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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백건우씨 부부와의 추억
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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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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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근수 / 편집위원

   
 ▲ 윤정희, 백건우씨 부부

1990년대 초이다. KBS-TV 가 파리와 유럽에서 10부작 드라마를 찍는데, 윤정희씨의 출연을 제안했다. 이를 위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게 되어 며칠 후, 오페라 앞 카페 드 라 페(café de la paix)에서 윤정희, 백건우씨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먼저 카페에 나가서 앉아 있자니,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40대 후반 나이 부부로서 팔짱도 아니고 마치 로미오-쥬리엣처럼 아직도 두 손을 꼭 잡고 다니다니, 내가 놀랐다. 다정함을 넘어 마치 막 예식을 올린 약혼자들 같았다. 백건우씨는 잠깐 길거리 신문가게에서 르 몽드 신문을 하나 사서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부부의 단골 카페로 데이트 삼아 자주 들르는 곳이라고 했다.

대화의 중심은 역시 드라마 출연 여부로 모아졌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오랜만의 출연이 될 터인데, 악역이더군요.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그런 역을 하기는 좀...”

그렇게 해서 이 드라마 건은 없었던 일로 결론지어졌다. 대화를 마치고 헤어질 때도 두 사람은 젊은 연인처럼 두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비슷한 연배이지만, 나는 그런 용기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이 부러웠다. 특히 부인 윤정희씨를 따뜻하게 감싸는 남편 백건우씨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사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더 오래 전인 1979년 10월이었다.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윤정희, 백건우씨 부부를 만났던 기억이다. 마들렌느 앞 대한항공 사무실 옆 중국식당에서였는데, 연극배우 손숙-김성옥씨 부부, 당시 한인회장 정준성씨와 함께였다. 손숙씨는 영화 ‘성춘향’에서 윤정희씨와 각각 향단이-춘향으로 출연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포도주 잔이 몇 순배 돌고 나니, 윤정희씨의 얼굴이 10대 소녀처럼 불그레해지기도 했다. 손숙씨의 한마디로 이 자리가 갑자기 냉랭하게 얼어붙게 되었다. 매우 민감한 질문이 던져졌기 때문이다. 제3자에 해당하는 내가 크게 당황될 정도로 얼굴이 화끈해지는 잔인한 주제였다.

때는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지 며칠 후이다. 유신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박 대통령 주변에는 여러 가지 악성 루머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은밀한 파티 장소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세상을 떠나게 된 사건도 사건이지만, 최고 권력자를 둘러싼 소문이 굉장할 때였다. 이 현상의 한 가운데를 손숙씨가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단 몇 십 초의 그 순간이 나에게는 아주 오랜 시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난감한 기분이었다.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이때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데, 바로 백건우씨다.

그가 말했다. “그게 사실은 말이지요...”

침착하고, 정중하고, 친절한 설명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감동하고, 그가 설명하는 진실에 설득되었다. 윤정희씨의 남편을 넘어서서 한 인간으로, 한 남자로서, 이렇게 현명하고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을까? 큰 감명을 받았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음악 또한 이처럼 세상을 넓게 보며 큰 가슴으로 포용하는 것이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인간성을 가진 백건우씨였다. 살아오면서 이만큼 남을 배려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를 가까이 본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 윤정희씨가 들려준 스타가 가지는 장점과 단점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언제이던가, 떼아트르 샹젤리제(Théâtre des Champs Elysées) 음악당 앞 카페에서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백건우씨가 말했다.

“글쎄 우리 외동딸이 바이올린을 하겠다는군요. 아휴, 음악을 한다는 게 고난의 길인데... 훗날, 저와 2중주를 할 수 있을 좋은 점은 있겠지요.”

아버지로서의 백건우씨는 고난의 길인 클래식 연주자가 되겠다는 딸의 선택이 안쓰러우면서도 감사하는 표정으로 읽혀졌다. 한 때 정명훈씨 가족과 자주 만날 즈음, 백건우-정명훈 피아니스트 2중주를 기대한 적이 있었지만, 물론 실현 안 된 꿈으로 남아있다.

지난 주, 한국의 매스컴들은 윤정희씨가 10년 전부터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바로 이 딸이 엄마를 간호하고 있다는 소식도 따랐다.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쩌랴! 사는 것이 그렇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그런 것을...

이 기사를 계기로 왕년의 영화배우 스타로서 그녀가 한국에서 누렸던 인기가 재조명되었다. 무려 30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니, 가히 기네스 북 기록에 오를 수 있을 수준이다. 옛날이기도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놀라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윤정희, 백건우씨 부부 그리고 그 따님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인가. 삶이 주는 교훈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우아하고 고운 자태의 윤정희씨, 너른 가슴을 가진 백건우씨, 그들과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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