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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의 친구 님 웨일즈(2)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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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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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장지락, 영원히 잊혀질뻔한 독립운동가
조국 위해 모든 것 던진 혁명가
한국 정부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노신예술학원. 장지락과 헬렌 스노우가 만난 계기가 된 도서실이 뒤편에 있다.

장지락(張志樂)이 중국 혁명의 수도 옌안에서 님웨일즈, 즉 헬렌 포스트 스노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영원히 잊혀진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그들이 숙청했던 옌안파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한국 독립운동의 방편으로서 신명을 바쳐 헌신했던 공산혁명 중국에서는 스파이 혐의로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지락을 만난 후 헬렌 포스트 스노우는 그를 ‘김산’이라는 이름으로 실명을 감추고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g)’라는 책으로 조국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한 혁명가의 치열한 삶과 투쟁을 펴냈다. 책 서문에 이렇게 첫인상을 글로 남겼다.

“자못 독특한 인물이며, 이런 인물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는 근래 7년 동안 동양에서 만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만난 혁명가 중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투철한 의식과 두려움을 모르는 자주성과 완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지락은 두 번째 편지를 받고서야 그녀를 만나 보기로 결심했다. 1937년 6월 18일이었다. 그는 비옷을 걸치고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을 걸어 헬렌이 머물고 있던 숙소로 찾아갔다. 옌안에서는 마오저둥(毛澤東)부터 대부분 사람들이 황토경사면에 반원형 토굴을 파고 살고 있었는데, 이런 집을 야오동(窯洞)이라 했다. 헬렌 숙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2달 동안 22차례나 계속되었다. 그녀는 질문했고, 장지락은 글로써만 대해왔던 영어라, 머릿속으로 작문을 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그의 말을 노트에 적었다. 그렇게 적은 노트가 7권이나 되었다.

장지락의 고향은 신의주 아래 압록강 하구의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리였다. 그는 1905년 5월 12일 태어났는데,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고 고향이 전쟁터가 되어 출생부터 고단하게 피난지에서 태어나야 했다. 다섯 살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이듬해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을 직접 보았다. 금단추 제복에 칼을 찬 일본 순사는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다고 어머니를 자신의 눈앞에서 무지막지하게 구타했다. 자라면서 독립운동가의 활약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1918년 13살에 평양 숭실중으로 유학을 갔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평양 시내가 독립만세소리로 들끓었을 때 그도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3월 7일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작은 형이 일본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라고 100원을 주었다. 지금 돈으로 하면 250~300만원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도쿄로 가서 고학을 하며 입시준비를 하였다. 그해 겨울 집으로 돌아왔다. 모스크바로 유학을 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가게를 하는 작은 형이 맡긴 돈 200원을 들고 모스크바로 가고자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과 봉천(오늘날 센양:瀋陽)을 거쳐 하얼빈까지 갔다. 그러나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내전이 벌어져 하얼빈과 시베리아 극동지역은 혼돈의 땅이 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신흥무관학교 쪽으로 돌렸다. 한겨울 만주벌판 700리 길을 걸어야 했다.

1920년 1월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여 동포의 집에서 겨울을 난 후 3월에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 “나이가 15살이라 3년 뒤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그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선생들이 놀라 달려왔다. 700리 길을 걸어서 찾아온 것을 가상히 여겨 특별 허락을 받았다. 3개월의 속성과정을 마치고 6월에 삼원보로 돌아가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해 12월 독립운동을 하고자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하며, 전설처럼 들어왔던 안창호·이동휘 같은 독립운동가를 만났다. 흥사단에 가입했다. 야간에 임시정부가 세운 인성학교에서 영어와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했다.

1921년 오성륜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무정부주의(아나키즘)를 받아들였다. 안창호의 추천으로 텐진의 난카이(南開)대학에 특대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나중에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된 ‘김염’이라는 조선인 중학생에 대한 모욕과 민족 차별에 항의하여 같이 입학했던 5명의 조선 학생들과 함께 자퇴했다. 장지락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시 작은 형이 학비를 대 주어 베이징으로 왔다.

1922년 봄 17살이 된 그는 베이징의 협화의학원에 입학하며 의학과 더불어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고자 결심했다. 3.1운동으로 기대했던 독립의 꿈이 좌절되자 그 실망감의 틈새에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가 스며들었다. 그는 사회주의 유학생 그룹인 한인학생동맹에 가입하여 ‘공산당 선언’ 등의 사회주의 문건을 접하기 시작했다. 장지락은 1923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 조선공산당 북경지부를 조직했다. 1925년 베이징에서 만난 공산 혁명가 김성숙을 찾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광둥(廣東)으로 가서 국립 광동대학 의학과 본과 2학년에 편입했다가 다시 법과로 전공을 바꾸었다.

   
▲ 헬렌 포스터 스노우

그 시기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이 붕괴되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으나, 중앙정부가 무너지고 각지에 군벌들이 군림하는 혼란시대였다. 1924년 쑨원은 사분오열된 국가를 국민당 중심으로 통일하기 위해 공산당과 손잡고(제1차 국공합작) 수습하려다 1925년 병사했다. 1926년 왕징웨이의 국민당 좌파 정부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각 지방의 군벌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북벌전쟁을 시작했다. 장제스는 광저우에서 시작해 우한과 난징을 거쳐 1927년 4월 상하이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에 새로운 국민당 우파 정부를 세워 왕징웨이의 좌파정부를 흡수했다.

장지락이 있는 광저우에서 4월 15일부터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광둥성의 공산주의자들은 장제스의 쿠데타와 학살에 대항하여 5월 1일 새벽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인민정부를 선포했다. 그러나 광둥 군벌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중국 공산당은 8월 난창봉기, 9월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며칠 가지 못하고 참혹하게 진압 당했다. 10월에는 농민 자위군와 난창봉기에서 패주하여 온 잔여부대가 재결집하여 하이펑현(海豊縣)과 루펑현(陸豊縣)을 장악하고 각각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이들은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토지혁명을 실시했고, 두 지역을 묶어 해륙풍(海陸豊) 소비에트라 불렀다. 1927년 12월 11일 중국 공산당은 광저우시에서 대대적인 무장봉기를 일으켜(광저우봉기) 시가지를 점령했으나 3일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수천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때 조선 청년 200여명도 희생되었다.

장지락은 광저우시 봉기에 참여했다가 도주하는 몸이 되었다. 1928년 1월 장지락은 해륙풍 소비에트에 도착했다.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해륙풍 소비에트 방위를 위해 다섯 번이나 전투에 참여하며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했다. 마침내 8월 6일 가까스로 홍콩으로 탈출했다. 그 후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이 되었다.

1930년 말 그는 북경 공안요원에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40여일 동안 여섯 차례나 물고문을 받았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신의주 형무소에서 무혐의로 석방되어 이듬해 6월 북경으로 돌아왔다. 중국공산당은 무사히 풀려난 그를 의심하여 제명했다. 1933년 다시 체포되어 강제 노역형을 받고 고국으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되어 다시 북경으로 탈출했다. 당 조직은 그를 외면했다. 그런 속에서 장지락은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고 이듬해 중국 산간닝(陝甘寧: 산시성 간쑤성, 닝샤자치구) 변구 주재 대표로 선출되었다.

   
▲ 김산이 1932년 텐진의 일본 영사관에 구금되었을 때 사진.

1936년 12월 그는 중국공산당과 홍군을 따라 옌안으로 갔다. 이후 1937년 6월 18일 옌안에 도착해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사와 물리, 화학을 강의하고 있던 헬렌 포스트 스노우와 만나게 되었다. 장지락이 헬렌을 만났을 때 그는 조선 해방을 위한 길로써 중국 혁명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이 혁명의 거친 태풍 속에 휘말려 사라질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헬렌에게 말했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 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중략)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개인이 결정할 유일한 것은)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그는 자유를 향해 전진했고, 결단코 굴복을 거부했으며, 자신이 그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계속 조직하고, 가르치고, 투쟁했다. 그런 그에게 그해 11월 저승사자와 같은 캉성(康生, 1898~1975)이라는 자가 당 중앙 조직부장으로 왔다. 그는 소련이 숙청전문가로 키운 자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 일본의 첩자,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처형하면서 1938년 10월 장지락을 그런 부류에 넣어 비밀리에 처형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그 시기 장지락은 전선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의 희망이 받아들여져 10월 19일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가는 도중 처형당했다.

헬렌 스노우는 1940년 미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the Song of Arirang: The Life Story of a Korean Rebel’을 펴냈다. 그녀는 장지락의 죽음을 이때는 물론 그 후로도 몇 십 년 동안 알지 못했다. 1983년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는 장지락의 처형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의 ‘명예 회복’을 결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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