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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간도지역 개척지의 첫 마을 용정을 가다항일투쟁시기에 간도지역 운동 기지…한인의 역사가 깃든 장소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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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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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우리 일행은 송강진에서 큰 곤욕을 치른 후 올 때와는 달리 남로를 택해 오후 4시 경에 용정시청에 도착했다. 짙은 회색의 5, 6층 건물들이 시가지를 형성한 소도시의 모습이다. 용정(龍井)은 항일투쟁시기에 간도지역 항일운동 기지의 중심이었다.

1910년대 간도지역의 총인구 13만 중 80%인 10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용정촌에 서는 시장 전경의 대부분 사진은 흰색 두루마기 한복을 입은 한인(韓人)들 일색이었다. 1944년의 만주지역(동북지역) 한인(韓人) 인구는 160여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미 서간도지역은 2년(1869~1870)간의 대흉작으로 인해 월경한인의 이주자가 급증하자 1869년 강계군수는 정부의 명도 받지 않고 서간도일대의 땅을 28면으로 분할해 강계, 초산, 자성, 후창군에 배속시켰다. 

정부에서도 1887년에는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파견하였으며, 당시 서변도 인구는 3만7000명이었다. 1900년 경 이도재 평북관찰사는 월경민을 보호하기 위해 압록강 대안지역을 평안북도 각 군에 배속시켰으며 충의사를 조직해 이주민을 보호했다. 1902년에는 관내에 향약을 설치하고 이용태를 향약장, 부향약장에 서상무, 이완구를 파원(派員)으로 임명해 사무를 관장케 했다.

두만강 대안의 동간도 지역은 1902년 간도시찰사 이범윤이 부임해 사포대와 영소를 설치한 곳도 용정과 모아산 일대였다. 일제의 1907년 간도파출소도 용정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볼 때 용정이 북간도의 중심 도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인들이 개간을 최초 시작한 용정시 부근의 개산둔진 일대가 회령부사 홍남주에 의해 1870년부터 두만강 이북지역의 개간이 허용되었으며, 그 후 진행된 경진개척(庚辰開拓)으로 인해 북간도 이주와 개척이 획기적으로 진척됐다. 이 때 개간자들의 토지 상황을 기록한 “간도토지대장”에서 간도 지명이 유래됐다.

2000년 개산둔진 광제욕에 세워진 “사이섬”의 비석이 간도 개척의 시작이 이곳에서 비롯됐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석도 1년도 안돼 중국 정부가 폭파시켜 버렸다. 간도지역에 대한 중국의 예민한 반응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이 본래 우리의 영토임을 자각하고 1899년에 명동촌에 가족들을 이끌고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김약연 집안(31명), 문병규 집안(40명), 김하규 집안(63명), 남종구 집안(7명)임정균, 문치정, 남위언 4가문이었고 이들은 명동서숙을 설립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북간도 민족교육의 최초의 시작은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이었다.

또한 1909년 이회영 일가가 6형제의 가족 50여명을 이끌고 남만주로 이주해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세워 항일운동의 기반 구축에 착수하였으며, 이미 1907년에서 1908년까지의 의병장들이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간도로 피신했다.

의병활동을 맹렬히 한 왕산 허위의 형제인 방산 허훈, 성산 허겸, 사촌인 범산 허형의 직계 후손들이 의병장 허위의 순국 이후 일제 경찰의 핍박을 피해 1915년 만주로 이주했다. 의병장 왕산 허위의 수제자로 1915년 대구에서 대한광복회 8도 조직을 결성해 191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한 박상진 총사령과 1917년 대한광복회 부사령을 임명받아 만주로 떠나는 김좌진 장군의 송별시는 유명해 소개해본다.

鴨江秋日送君行 快許丹心誓約明 匣裏龍泉光射斗 立功指日凱歌聲

“가을날 압록강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면서, 쾌히 그대의 성심을 허락하니 우리의 서약이 분명해졌구려, 칼집에 든 용천검의 빛이 북두칠성을 비추이고, 빠른 시일에 공을 세워 개선가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를 바란다오”

용정의 서전서숙의 민족주의 학통을 이어 받은 것이 규암 김약연의 명동서숙(명동학교로 개칭함)이었다. 그리고 은진학교는 캐나다 선교사가 세운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당시 북간도의 민족학교는 명동학교, 신흥학교, 동흥중학교, 대성학교 등 100여 개교에 달했으며 이주 한인들에게 민족교육과 항일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명동학교 출신에는 라운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윤동주, 송몽규 등이 있으며, 은진중학 출신에는 김백일, 강원용, 문익환, 김종면, 안병무, 양봉웅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용정 출신 인물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투철한 항일정신과 용정의 명동학교 등의 민족교육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바탕이 됐다.

또한 3·1항일 투쟁의 영향을 받은 “용정촌 3·13 항일의거”는 19명의 사망자를 내었으며,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은 명동학교 출신인 최봉설 등이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우리 일행은 용정시장 및 관련인사들과 인사를 나눈 후 큰 홀에서 시장의 용정시 현황을 듣고 식사를 했다. 이 때 만난 최근갑 용정시 해외연의회 이사장은 최근까지 서신과 서예작품, 책을 나에게 보내주는 등 우의가 돈독했다. 강원용 목사의 은진중학 후배인 최근갑 이사장은 서울에 올 때마다 강원용 목사와 나를 만나곤 했다.

이튿날 연길시내에 있는 연변민속박물관을 관람했다. 의복, 전통 가구, 생활주방기구 등 민속자료가 진열돼 있었으며, 초기 개간시의 농기구들이 많이 보였다. 곧이어 조두남의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용정에 도착해 용두레 우물과 용문교, 대성중학교에 있는 기념관을 관람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학교가 점차 폐교된 명동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가 있었으며, 용정의 민족학교에서 배출한 저항시인 윤동주와 애국지사 및 유명 인물들의 얼굴 사진이 걸려있었다. 윤동주도 대성중학 출신이다.

우리 일행은 윤동주 묘소와 3·13 의사 묘소를 찾기로 했다. 윤동주 시인의 묘소는 풀이 하나도 자라지 않는 황토 무덤으로 있었으며, 3·13 의사 묘소는 모두 풀이 무성하고 봉분의 흙이 무너지는 등 돌보지 않는 무덤이 돼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리고 용정 자그마한 천주교회를 둘러보고, 우리 동포들이 사는 집을 구경했다. 집 구조는 다섯 평짜리 방 두 개로 꾸며졌고, 앞 방 마루 아래엔 솥 두 개를 걸어두고 식사를 하는 모양이고, 식사 후는 마루를 덮어 거실로 이용하는데 매우 비좁은 구조다. 날씨가 추운 간도지역에서 개량된 온돌구조로 보인다.

일송정이 있었다는 비암산의 가파른 언덕에 일행들이 올라 용정일대를 조망했다. 발아래 강물만 굽이굽이 뱀처럼 사행(蛇行)하는 해란강의 모습에 반했다. 일송정 소나무는 불탔다는 소문이고 5년생 정도 보이는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이었다. 연길 방향에 모아산이 필봉으로 보인다.

저녁 식사는 우리 동포인 김순자 여사가 운영하는 연길의 삼꽃식당(蔘花食堂)에서 했다. 된장, 고추장은 어느 정도 우리 맛이나 갓 담은 배추김치는 먹기가 어려운 맛이었다. 김순자 여사는 ‘사랑가’와 ‘돌아와요 부산항’을 좋아한다고 했다. 손녀가 세 명인데 양세봉(8살), 양춘화(14), 김매(12세)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일행 중에는 보신탕을 먹기 위해 이 집을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가 숙박하는 백산호텔 남쪽에는 ‘포이합통하(부르하통하)’가 흐른다. 물 수량은 제법 많은 편은 아니다. 이 강은 북쪽에서 연집하를 만나고 남쪽에서 해란강과 팔도하를 만난 물을 만나 두만강으로 흐른다.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말까지 북간도지역의 국경선이 ‘포이합통하(부르하통하)’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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