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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아난다
코리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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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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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 / 칼럼니스트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동시에 국내 정세도 파국 일보 직전까지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격한 풍랑(風浪)을 맞고 있는 항해 중인 배안에서 서로 ‘네 편이 옳다, 내 편이 옳다’ 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이런 때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은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후손들에게 들려 줄 가르침을 받고 싶다.

한국 근대사의 선각자요 스승이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낸 안중근 의사이다. 그는 동양평화를 해치는 원흉이며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두목인 일본의 최고 충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세발의 총알로 보기 좋게 사살하였다. 만주 여순 법정에서 피고 안중근에 대한 심문이 진행 될 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죄과 15개 항목을 일일이 나열해 누가 원고인지, 피고 인지 모를 정도로 재판정은 엄숙했다고 한다. 마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심문하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는 정조대왕이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승하 한 후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때 정조의 나이 50이었으니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뒤를 이은 순조는 11세에 왕이 되어 수렴청정과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당파싸움과 연계되어 조정은 날로 약해지고 외척들의 득세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홍경래 난이 일어나 조정은 더욱 나약해져갔다. 더군다나 근대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천주교의 유입이었는데도 세계사적 탄압으로 서구 문물의 도입이 원천 봉쇄되었다. 개혁 성향의 효명세자는 충실히 왕권수업을 실행하고 있었으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고 순조마저 세상을 떠나자 세손(世孫)인 8세의 헌종이 즉위하니 수렴청정과 외척(外戚)세력의 세도정치는 날로 기세를 떨쳤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적통이 아닌 먼 왕족출신 강화도령 철종을 영립하게 되고 철종 또한 후사 없이 승하하자 역시 먼 왕족 출신의 12살의 고종을 영입하게 되니 이 때가 1864년이다. 대원군의 섭정이 10년 동안 이루어 졌고 1874년부터 고종의 친정 체제가 시작되었으나 대원군과 민씨 세력 간의 알력,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 청나라, 러시아 3국의 세력,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친일, 친청, 친러 파 등이 싸움을 벌였고 개화파와 수구파 등 알력으로 조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정착되어 에도(지금의 동경) 시대를 열어 국가를 안정화하고 에도라는 거대한 소비도시를 만들어 상업과 물류 이동이 촉진되고 근대화된 도시 경제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1854년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 하고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니 일본군국주의 시대가 태동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시기에 해외 유학에서 돌아와 일본 제국의 헌법을 기초하고 수차례에 걸친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을사늑약 이후 한반도 합병의 총책으로 초대 통감을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전 세계는 경악했고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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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4일에는 교민들로 구성된 음악인들이 모여 뜻 깊은 연주회를 열었다. 특히 조성규 지휘자에 의해 작곡되고 초연(初演)된 ‘안중근’ 곡은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안중근 의사의 친필 휘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아난다)을 그대로 시연(試演)한 서예 퍼포먼스는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다. 이 어록은 사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내려간 유언이다. 안 의사는 손가락 낙관을 사용했는데 왼손 무명지(無名指) 마디가 없는 것은 동지들과 독립투쟁 결의를 하면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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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대한 독립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중근 의사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이 부족해서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식을 축적해야 된다는 말이다. 노벨상 수상 국가 중 일본은 아시아 최고로 8위인 25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거의가 기초 과학인 물리, 화학, 생리의학 상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수상한 평화상 하나와 비교할 때 얼마나 차이가 많은가? 기초학문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온 일본정부와 비교해볼 일이다. 최근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소재부품 수출규제 조치에 우리가 당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소재부품 개발이 몇 년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수 십 년을 투자해야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자기 나라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강대국의 자비만을 기대할 수도 없다. 자기민족을, 자기 나라를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으면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을 통탄하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5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그로부터 5개월 후 4300년 동안 이어온 단군조선 이래의 한민족 국가의 적통이 완전히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최근 20-30년 동안 한국의 위상은 과학 기술면에서, 산업부문에서, 스포츠/문화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해왔으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진입했다. 세계 유수 대학의 우등생은 한국학생이 휩쓸고 있으며 그 다음이 유태인, 독일인 순서라고 한다. 유태인은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나 노벨상 수상자 비율은 23%에 이르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어록을 다시 음미하면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다짐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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