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9.20 금 17:07
재외선거, 의료보험
> 오피니언 > 본국지논단
"왼발 먼저 디딜까, 오른발 먼저 디딜까"
매일경제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8.19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전영애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지키는 여백서원 입구에다 작은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름도 `긴 골`인 골짜기 끝이라 누가 떼로 몰려올 곳이 아닌 줄이야 물론 알고 그런 일을 벌였다. 서원을 찾는 어른들을 따라 어린이들이 제법 오는 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좋은 대안학교가 있어서, 밝고 환한 그곳의 어린이들도 가끔은 올 것 같아 작고 예쁜 집부터 지었는데 도서관은 곧 책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빨리 크는 터라 이제 필요 없어진 자녀들 책을 주시는 분들이 제법 있어서다.
누가 오랴 했는데 살금살금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생겼다. 어딘가 이웃 마을에 사는 듯 자전거를 타고 와서 책을 읽다가 가는데, 도서관 안에 놓인 원고지에다 예쁜 글을 남겨놓고 가기도 한다. 그래서 그중 6학년인 어린이는 사서로, 3학년인 어린이는 부사서로 임명했다.

부사서는 처음 서원에 와서 서원을 둘러본 다음 나와 할 얘기가 좀 있다며 어른을 먼저 보내더니 나에게 심각한 얼굴로 "서원이 아주 큰데, 어디서 지원은 좀 받으시냐"고 물었던 그 어린이다. 내가 우직하게 혼자 힘으로 벌인 일로 3학년짜리 아이에게마저 걱정을 끼쳐 계면쩍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는데, 그 후로 그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혼자, 또는 친구들과 서원도서관에 오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어린이 도서관에 둔 원고지에 또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한동안 도서관을 소홀히 하게 됐다고 미안해하며 일본 외할머니 댁에 다녀온다고.

그 전 주일에는 지역문화센터에서 하는 공연 팸플릿을 하나 두고 갔길래 보니 우리 사서와 부사서가 다 등장인물로 이름이 올라 있어 달려갔다. 들꽃을 꺾어 작은 묶음으로 만들어 들고 갔다. 우리 부사서의 온 가족과 사서가 등장하는데 부사서 어머니가 주역인 소리 한마당 공연이었다. 어머니 `도쿄댁`은 창을 배우러 와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재일교포로, 자신의 이야기를, 또 장터에서 비닐봉지 좀 그만 쓰자는 다급한 환경론을 재미있게 창극으로 꾸민 공연을 선보이며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재미있는 창 한마당으로 꾸며진 자신의 이야기. 재일교포들의 보편적인 상황일 것으로 짐작되기에 낯설지 않은 소재임에도 웃음 가운데 눈시울이 뜨거웠다. 일본 사회에서 달리 자기 수련의 길은 주어지지 않아 평생 청소차를 몰면서도 가족에게 헌신적이었고 자식은 굳이 한인학교에 넣었던 아버지 이야기, 그런 아버지가 좀 더 `번듯한` 직업을 가졌으면 했던 철없던 어린 시절의 반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향하던 마음이 실려 있어서였다. 그때의 설렘은 예컨대 이런 노래에 담겼다. 말로만 듣고 그리기만 하던 조국 땅을 정말로 밟을 때 "왼발을 먼저 디딜까, 오른발을 먼저 디딜까…." 물론 그런 소녀가 조국의 현실 속에서 긴 세월 겪어야 했을 것은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저렸다. 더구나 그 구절은 본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교포사회에서 불리던 노래라 했다.

이제 이 작은 마을에서나마 터 잡아 가정을 이루고 저런 예쁜 아이까지 기르고 있는 도쿄댁이 참으로 귀하고 예뻐 보였다.

그런 모녀가 오랜만에 친정, 또 외갓집에 가니 갈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을까. 그런데 그게 하필 요즘이라 가는 이들도, 반가운 딸과 손녀를 맞는 외가 가족들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다. 이들이 편안히 오갈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빈다.

오래 겪어왔고, 이즘에 또 겪고 있는 이 한일 간의 소용돌이는, 오랜 불균형을 이뤘던 두 나라의 모든 부문에서 높이에 격차가 없을 때만 궁극적 극복이 가능할 일이다. 우리 역사와 경제를 돌아보든, 이웃 어디를 둘러보든, 우리의 자존감을 생각하든, 내 꼬마 친구를 위해서든 우리가 우리를 진정으로 높여야 할 이유들뿐이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