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예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면 첫 번째 촛불이 밝혀진다. 이때가 되면 내가 사는 조용한 거리에도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발하는 화려한 불빛이 흐른다.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나도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자신을 불현듯 발견하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맞을 마음의 준비도 한다.

우리는 보통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향해서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 속에 숨어 있는 많은 비밀을 괴테와 더불어 ‘질풍과 노도’의 시대를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실러는 정곡을 찔러 간결하게 묘사했다. 제법 긴 그의 시 ‘공자의 격언’의 첫 구절은 “시간의 걸음은 삼중(三重)이다: 미래는 어물거리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쏜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조용하게 서 있다”로 시작한다. 물론 시간에 대한 이런 문학적인 해석은 물리학이나 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간의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여러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드는 구절이다.

우리는 거의 과거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본다. 반대로 허황하기 짝이 없는 미래의 꿈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도 만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현재’라는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현재를 의식하고 사는 사람들도 대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쾌락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찰나(刹那)주의자 정도로 인식된다. 가령 <루카복음>에는 세속의 순간적인 유혹과 욕망에 빠져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蕩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불교에도 가장 작은 시간단위인 찰나의 미망(迷妄)에 빠져 억겁(億劫)의 진리를 잊은 사람을 지칭하는 찰나주의자라는 표현이 있다. 끝없이 흐르는 영원한 진리를 망각하고 과거의 경험이 주는 고통과 아직 경험치 못한 미래의 불안감을 잊으려고 아주 짧게 지나치는 현재의 쾌락에 빠지는 삶을 경고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면서부터 현재라는 시간개념은 점차 시간의 총체성을 담은, 보다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항상 관철되고 있다고 믿는 영원한 진리는 마음의 평정을 가져올 수 있지만, 종종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고 타성에도 젖게 한다. 그래서 역동적인 근대의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려 있는, 따라서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지금’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본래적인 의미를 주는 시간을 보았다. 이와 관련해서 ‘희망의 원칙’을 설파한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런 지금을 ‘이글거리지만, 아직은 어두운’ 상태라고 실감 있게 설명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순간을 즐기는 허무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시간을 단지 소비하는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그들은 과거의 불행과 재앙을 딛고 긴장된 현재 속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희망의 시간을 동시대인과 함께 찾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현재적 인간을 나는 넬슨 만델라에서 발견한다. 금년 7월18일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7년 동안 외딴 로벤섬의 감옥에 유배되었지만 자유를 향한 그의 정신과 의지는 희망과 절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그 많은 순간들을 지나면서 마침내 어두운 감옥의 두꺼운 벽을 부수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현대 독일 미술계에 있어서 거장의 한 사람인 귄터 위커가 제작한 작품이 최근에 선보였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의 책이 여러 개의 굵은 못들에 의해서 관통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청동으로 된 조형물이다. 크기는 같지만 밝고 어두운 두 가지 색상으로 되어 있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되었던 야만적인 인종차별도 상기시키는 이 작품은 자유를 위한 기나긴 만델라의 투쟁과 고통이 화해로 귀결되는 것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했다.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자신의 행위내용이어야만 한다는 진실을 만델라가 분명히 보여주었기에 위커는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4년 전 봄, ‘갤러리 현대’에서 열렸던 ‘귄터 위커 - 고통받는 사람들’이라는 자신의 특별전시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서울구치소의 감방에 갇혀 있었던 나에게 그는 따뜻한 인사를 전했고, 그 후 구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의 갈등과 증오를 화해와 용서로 바꾸어 ‘무지개 나라’를 만들려 했던 만델라를 기억하며 그처럼 현재를 철저히 살았던 사람의 출현을 고대하는 소리를 나는 종종 듣는다. 70년이 넘도록 남남갈등과 남북갈등에 너무나도 시달리면서 살아왔기에 당연히 그런 절실한 바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만델라가 보여주었던 화해의 정신을 빌려 많은 국민이 요구하고 있는 ‘적폐청산’을 비난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럴 때면 나는 먼저 니체의 짧은 문장 하나를 떠올린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떤 친구가 너에게 나쁜 짓을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해라. 나는 네가 나에게 했던 짓을 용서하마. 그런데 네가 네 자신에게 했던 것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오랫동안 권력을 거머쥐었던 그들이 먼저 증오와 대결이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자기반성은커녕 만델라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 적폐청산을 비방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가 보내는 한 해는 많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전쟁의 문턱까지 갔던 한반도의 정세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지나면서 판문점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릴 정도로 변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2차 북·미 정상회담도 결국 새해로 넘어갔다. 종전을 넘어 평화로 가는 여정이 여전히 험난하다는 사실을 새삼 나도 확인하면서 또 한 해를 보낸다.

나는 금년 첫 칼럼 ‘전쟁과 평화’에서 두꺼운 얼음층에 갇힌 쇄빙선이 뱃길을 뚫기 위해서 선체를 좌우로 강하게 흔드는 비유를 들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새해에도 역시 한반도가 맞을 엄중한 시간의 의미를 절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용기를 함께 모아 안팎의 난관을 혁파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를 위해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는 만델라의 호소를 상기하면서 나는 긴장과 기대 속에서 새해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