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 호~이’ 콧등을 치며 주먹지르기를 하고, 갖은 폼을 다 잡으며 쌍절곤을 앞뒤로 휘둘렀다. 자기가 휘두른 봉에 뒤통수를 맞아 꼬꾸라지며 머리를 긁적이기도 했다.」 아마도 단번에 낯설지 않은 이 추억담의 주인공을 알아맞힐 수 있으리라. 부르스리(이소룡) 1960~70년대를 풍미한 무술스타. 지구촌을 동양 무술의 열기로 몰아넣은 그가 독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지난 2월 고국을 찾은 부르스리의 아버지 이근태(李根泰, 60세) 재독일한인회장을 만났다.                                                                                       [편집위원 김명신]

“아들은 ‘부르스 리’고 딸은 ‘린다’입니다”
- 정말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무도가 이소룡을 따라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 그런데 ‘린다’는 누구에요?
“이소룡의 아내입니다.”
- 본인들은 이름을 마음에 들어합니까?
“흡족해합니다. 이름 때문인가... 부르스는 제 후계자가 됐어요.”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이근태 회장은 경력 50년의 무도가다. 그는 고수중의 고수다. 태권도와 합기도, 쿵후, 검도, 킥타이복싱 등에서 도합 53단이다. 어려서부터 발차기를 잘하던 차남 부르스 리도 상당한 실력자로 성장했지만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이라고 한다.

그의 주먹은 보통 성인 남성의 1.5배쯤 되고 모양은 골이 없어져 뭉그러져 있다. 이 울퉁불퉁한 사나이가 4만명의 재독일한인동포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일견 험상궂을 것 같지만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은 수줍은 소녀마냥 조심스럽고 차분했다.

45명 광부 동지들의 보증으로 세운 첫 도장

독일 행은 운명의 장난처럼 다가왔다. 원래 그는 중동건설 붐을 따라 사우디로 가려고 했다. 전공도 토목이었다. 그런데 매형이 자신 몰래 파독 광부 지원서를 넣는 바람에 방향을 독일로 바꾸게 됐다.
1977년 3월 독일로 떠났다. 하지만 광부계약은 3년 시한으로 미래가 불투명했다. 더욱이 광부라는 직업은 독일에서도 ‘막장 인생’으로 불렸다. 떠나기에 앞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꿈도 꾸지 않던 생판 낯설디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어요?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특기를 살리는 것뿐이잖아요. 제가 남들보다 특별나게 잘하는 건 태권도 밖에 없었습니다.”

막연하게 그렇게 결심하고서 독일 땅을 밟았다. 그리고 뚝심 하나로 그 해 10월 무도 도장을 차렸다. 개설 비용은 동료 한국인 광부 45명이 연대 보증을 서서 은행에서 1만 마르크를 빌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동지애는 너무나 따뜻하고 고마운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호기 있게 차린 그의 첫 도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독일인 명의로 차린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영주권이 없었으니 현지인의 명의를 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 잠시 한국을 다녀오는 사이 도장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영업등록마저 폐업 처리돼 있었다. 망연자실할 뿐 아무 대책이 없었다.

“거 참 희한한 일이죠. 그 때 제자 중 한 명이 자기 부모님을 설득해 선뜻 3만 마르크를 빌려주는 겁니다. 꽤 큰 돈이었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실감나더군요. ‘언제나 좋은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부님 구텐탁(Guten Tag!)’

다시 용기를 내어 도장을 차렸다. 비용을 아끼려고 밤을 새워가며 도장 안팎을 손수 페인트칠 하고 전기시설을 하고 샌드백도 달았다. 그런데 치명적인 난관이 있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태권도’가 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동양무술로 알려진 건 부르스리 영화의 ‘쿵후’, 일본의 ‘가라데’ 정도였다. 그는 홍보마케팅으로 지극히 원초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방에 격파시범을 한다고 방을 부치고 다녔습니다. 말이 좋아 격파지 몸에 피멍이 드는 차력이었습니다. 처음엔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던 게 많을 땐 관객이 3000명까지도 되더군요.”
그렇게 작게 출발한 이근태 도장은 현재 독일 전역에 70개가 있다. 전국 곳곳 없는 데가 없다. 이근태 도장(스포츠아카데미 닥터리)은 독일 최대의 무도 프랜차이즈로 태권도와 쿵푸, 합기도, 검도, 킥타이복싱 등 온갖 무술을 익힐 수 있다. 종목을 선택할 수 있고, 한 곳에서 여러 무술을 익힐 수 있는 점이 개인 기호를 중시하는 서양인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이 회장은 사실 돈벌이보다는 한국문화의 전도사라는 데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인 예(禮)와 의(義), 도(道)를 독일인들에게 보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도의 기본은 정신 수련입니다. 육체 단련은 그 다음이지요. 예의(禮義)와 도(道)를 알아야만 스승과 제자가 서로 존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도의 사제 간은 이성과의 사랑과도 빗댈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지는 겁니다.”

유대감과 존경은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덩치가 산만한 독일인들이 이 회장을 마주치면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다. 파란 눈의 어린이들도 ‘사부님 구텐탁(Guten Tag!)’하며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이 회장 본인도 제자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모든 인연은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잖아요.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려면 스스로가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멘트 75cm 이마 격파’ 기네스기록 보유자

독일에서 ‘무학박사 닥터 리’로 불리는 이 회장은 제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1998년 세계무술협회를 창설했다. 그 해 4월 제 1회 세계무술선수권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한 이래 3년에 한번씩 세계 대회를 열고 있다. 세계무술선수권대회에는 전 세계 50여개국 무도가 1,500명이 참가하고 있다.
그는 기인(奇人)이다. 이마로 1장에 5cm두께의 시멘트 블록을 단박에 무려 25장이나 깨뜨릴 수 있다. 박치기왕 김일이 울고 갈 괴력이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氣)를 모아 이마로 내리치면 허리 춤 높이까지 쌓여 있던 시멘트 블록이 맨 아랫장까지 두 동강이 난다. 그의 이마 격파 기록은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그는 ARD, SAT, RTL, WTR 등 독일 방송의 단골 출연자여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몇 년 전에는 MBC의 ‘기인열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때 한국에서 시멘트 블록을 구할 수 없어 독일에서 공수해 왔는데, 운송료가 출연료보다 몇 곱절 많이 들어 ‘손해 봤다’며 웃음 지었다.

“인간의 몸은 정말 신기합니다. 뇌의 신경세포 3억개 중 한 가닥이 잘못되어도 눈이 비뚤어지고 사지(四肢)가 뒤틀리잖아요. 그런 약한 인체가 수련을 거듭해 경지에 오르면 스스로를 제어할 힘이 생겨납니다.”

단합된 재독한인사회 ‘회관’을 세운다

무도가인 그의 현업(現業)은 재독일한인회장이다. 작년 5월 회장에 당선됐다. 재독일한인회는 지방조직 38개와 광부협회, 간호협회, 체육회 등 3개의 직능단체를 합해 모두 41개 조직으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재독일한인회는 동포 수 4만 명에 조직 역사 46년으로 유럽에서 가장 유서가 깊고 규모도 방대하다.
2007년 독일 동포사회는 크게 분열한 적이 있다. 최대 연례행사인 ‘8.15축전’이 둘로 나뉘어 따로 개최된 것. 갈등으로 인해 전국의 동포들이 한 자리 모이던 잔치가 망가진 것이다. ‘재독동포 8.15축전’은 1년에 한 번 고향에서처럼 사물놀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빈대떡에 파전, 막걸리, 국화빵을 맛볼 수 있는 흥겨운 축제의 장이다.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작년 한인회장에 출마하면서 쪼개진 한인회 통합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42일 동안 전국을 돌며 한인회장들을 만나 설득하였습니다. 동포사회 발전의 핵심은 화합과 동참이니까 힘을 하나로 모으자!”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회장이 부지런히 다니며 설득한 끝에 재독일한인회는 다시 통합됐다. 선거에서는 역대 최다득표를 받으며 회장에 당선됐다.
이근태 회장은 올해 안에 반드시 이뤄내야 할 목표가 있다. 독일동포사회의 숙원인 한인회관을 짓는 일이다. 지금까지 재독일한인회는 회장의 개인 사무실에서 운영돼 왔다. 그러다보니 회장이 바뀔 때마다 번번이 한인회 사무실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이 회장 역시 회장을 맡으면서 민덴에 있는 도장을 일부러 폐쇄해야만 했다. 이 회장은 지난 1월 31일 회관 건립 모금 추진위원회를 결성하며 그 스타트를 끊었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않겠어요. 흐지부지 하지 않을 겁니다. 모금기간도 올 12월말로 정해 놓고 그 때까지 마련된 자금으로 회관을 짓거나 살 계획입니다. 독일동포들이 열심히 힘을 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국 정부도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지 않는다. 스스로 결심한 건 옹고집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온 독일에서 성공을 일궈낸 ‘무학박사 닥터리’ ‘부르스 리 아버지’ 이근태(李根泰) 회장. 그가 독일 한인회의 변혁과 발전을 얼마나 앞당길 것인가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글 / 김명신 편집위원
사진 / 최유정 기자

李根泰 재독일한인회장은?   1949년 3월    전북 순창 유등면에서 출생   1977년 3월    파독광부로 독일 행   1977년 10월  제1호 ‘이근태 무도 도장’ 설립   1998년 4월    세계무술협회 창설 및 제1회 세계무술선수권대회 개최(서울)   2008년 5월    재독일한인회장(現) 당선                        현재 스포츠 아카데미 Dr. Lee ·원장 무학박사                        독일전국에 ‘이근태 무도 도장’ 70개   * 연락처 -- 독일 하노버 0511-441343, hauptzentrum@sport-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