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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들이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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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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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남보다 못한 영국 왕자비 일가, 혈연의 의미 곱씹게 해
사고뭉치 북한에 선뜻 마음 여는 우리 세태도 놀라워

   
 

‘밥 잘 사주는 건 모르겠으나 무지 예쁜 누나’인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이 영국 해리 왕자의 배필이 됐다. 왕실 결혼식에 으레 따라붙던 ‘동화 같은’이란 말 대신 이번엔 ‘파격’이란 평이 넘쳐났다. 신부가 신랑보다 세 살 더 많다는 건 얘깃거리도 안됐다. 평소 “페미니스트인 게 자랑스럽다”던 메건은 신랑에게 복종 서약을 하는 오랜 전통을 깼는가 하면 신부 입장 때도 씩씩하게 혼자 걸어 들어갔다.

틀에 박힌 동화를 벗어나 젠더 감수성이 가미된 21세기판 로맨틱 코미디를 지향한 둘의 결혼식에 옥에 티가 있긴 했다. 메건의 ‘나 홀로 입장’이 당당한 여권(女權) 의식의 발로라기보다 아버지의 불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급작스러운 심장병 탓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아마 더 큰 이유는 딸을 볼 낯이 없어서였을 게다. 결혼 발표 후 남다른 신붓감에 대한 기대가 하늘을 찌르던 즈음, 그가 파파라치와 짜고 민망한 연출 사진을 찍은 게 들통났으니 말이다.

그나마 아버진 양반이다. 매부가 될 해리 왕자에게 ‘이 결혼이 영국 왕실 역사상 최대 실수가 될 것’이라며 취소를 종용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이복 오빠, 픽션을 가장해 동생 흠을 잡는 자서전을 쓰겠다는 이복 언니, ‘왕실’이 들어간 상호를 앞세워 대마초 사업을 벌이고 나선 조카까지…. 도무지 가족끼리 왜들 그러는 건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가 봐도 딱할 지경이다.

저렇듯 남보다 훨씬 못한 가족 얘기를 접할 때마다 혈연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피를 나눈 사이라는 게 얼마나 징글징글하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며 지지고 볶고 살아들 가는 걸까. 죽도록 싸우다가도 남이 흉이라도 볼라치면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하며 역성을 들게 되고, 다신 안 볼 것처럼 헤어졌다가도 어렵다며 손 내밀면 번번이 잡아주게 하는 것이 바로 핏줄의 무서운 힘이다.

세상 어느 족속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가족을 ‘운명 공동체’라 여기는 정서가 우린 특히 유별난 듯하다. 집안 부양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게 비단 부모 세대만의 얘기가 아니다. 철딱서니 없다는 요즘 아이들마저 가족 챙기려는 마음만큼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힘겨운 연습생 생활 끝에 데뷔하는 아이돌들만 봐도 그렇다. 악착같이 돈 벌어서 처음 쓰는 곳이 대부분 부모님 집 사드리는 거란다. 얼마 전 힙합 오디션을 보다간 열여덟 살 소년이 쓴 랩 가사 속 절절한 가족애에 그만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엄마 편의점 더 안 해도 될 때까지 벌고/엄마 좋아하는 시골 가서 살게 해줄게/이 말 지킬 순 있겠지/나 자신 없는데/이 말 지켜내야만 해(…)민규야 형만 꼭 믿고 따라와/난 불행해도 가족들은 웃게 해줘야지 맞아’(이병재 ‘전혀’)

‘나는 불행해도 가족은 웃게 해주겠다’는 놀라운 자기희생의 다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일찍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설파했듯 나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려는 이기적 목적을 이루자면 나와 유전자를 공유한 피붙이를 돕는 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인 걸까. 물론 서로 아끼며 살아온 훈훈한 가족 간이라면 굳이 이 삭막하기 짝이 없는 이론까지 들이댈 필요는 없을 터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남남처럼 지내던 혈육이 순식간에 구원(舊怨)을 풀고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된다면 얘기가 좀 다르다.

최근 판문점에서 두 번째로 만난 남북 정상이 두 팔 벌려 얼싸안는 장면을 보면서 흡사 부자 상봉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잔뜩 사고 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이제 됐다. 그만하면 됐다”하며 다독이는 모습이라고 할까. 비단 둘 사이만 그런 게 아니다. 60여 년의 험난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또다시 급속도로 마음을 여는 우리 국민을 보면 북한은 무슨 짓을 해도 무작정 감싸줘야 하는 식구 같은 존재라 여기는구나 싶다. 속도 참 좋다고 탓해 봤자 소용없다. 피란 원래 그런 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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