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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진실- 영화 ‘박열’을 보고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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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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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 도쿄경제대 교수

<박열>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점도 있었다. 이 영화는 박열의 열렬한 저항정신을 잘 묘사했으나 ‘그 이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없다. 박열은 1926년부터 지바 형무소에 투옥됐으나 9년 뒤인 1935년에 전향해 “저 역시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이 원고를 5월26일 한밤중에 쓰고 있다. 원고 마감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이번은 특히 더 그랬다. 일본 <아사히신문> 5월25일치 1면 기사 제목은 ‘북, 핵실험장 폭파’ ‘미, 단계적 비핵화를 용인-트럼프씨, 북에 양보’였다. 그러나 26일치 제목은 ‘북-미 정상회담 중지’였다.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25일 밤 인터넷 뉴스는 ‘미국, 북과 6월12일 회담할 수도’라고 전했다. 오늘 뉴스는 ‘남북 정상 판문점에서 두번째 회담’을 전하고 있다.

날마다 급변한다. 아니, 시간마다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매스미디어는 물론 정치가, 외교 관계자, 학자들도 분명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한겨레신문사 여러분도 무척 바쁘겠다. 북-미 회담 실현을 위한 문재인 정권의 끈질긴 노력이 인상적이지만 앞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마치 제트 코스터 같다. 하지만 이건 유원지의 놀이기구가 아니다. 전쟁이냐 평화냐의 중대문제가 걸린 제트 코스터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오늘 쓴 일이 내일 뒤집어져버릴지도 모르는데.

나는 물론 어떻게든 이것이 항구적인 평화구축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정권이 그런 근본적인 방침 전환을 쉽게 감행하리라고 쉬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팔레스타인에서 보여준 미국과 이스라엘 정권의 무자비한 모습이 생생하게 인상에 남아 있다. 5월14일,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옮긴 데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해 어린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인 5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스라엘 건국이 강행된 것이 1948년이다. 한반도에 두개의 국가가 만들어진 것과 같은 시기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조선민족은 그 뒤 70년간 부조리한 분단과 유혈을 경험해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고난도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만 그것이 느닷없이 종료된다는 게 가능할까?

7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타국의 자의에 농락당하고, 이산의 고통도 경험해온 조선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낙관적 예측에 대해서는 경계심이 앞선다. 남북을 불문하고 조선민족 대다수가 이 평화의 예감을 얼마나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그 절실한 기대가 또다시 짓밟히게 될 때의 실망은 얼마나 클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지난 5월17일부터 22일까지 한국에 체류했다. 인천의 제6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참석했다. 21일 아침 항구에 정박중인 대형 화물선에서 불이 났다. 선내는 13층 구조로 돼 있고, 선창에 만재한(가득 실은) 중고차가 불타고 있다고 했다. 육상과 해상에서 계속 물을 끼얹었으나 선내로 물이 들어가지 못해 좀체 진화될 기미도 없이 검은 연기가 대단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인천시에 널리 퍼져 시계는 흐리고 목과 눈이 따가웠다. 영화제 실행위원은 마스크를 잔뜩 마련해 관객에게 배포했으나 결국 야외행사는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냉정하다고 할까, 오히려 무관심하기조차 한 것으로 보였다. 그 광경이 마치 한반도를 둘러싸고 현재진행중인 사태의 은유처럼 생각됐다. 한국을 떠나는 날에도 배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나는 두차례 강연을 했다. 하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시예비치와 2016년 11월 원전사고 재난지 후쿠시마를 찾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또 하나는 이준익 감독 작품인 영화 <박열> 상영에 맞춘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투쟁한 두명의 일본인 여성’이란 제목의 강연이었다.(그밖에 인천문화재단 주최의 좌담회 ‘디아스포라 문학과 세계문학’에도 참가했다)

강연에서 얘기한 ‘두명의 일본인 여성’ 중 한 사람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는 박열의 배우자이자 동지였다. 하지만 후미코는 결코 박열의 보좌역이나 추종자가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은 하세가와 데루(1912~1947)다. 에스페란티스트(에스페란토 사용자)인 반전평화운동가인데,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국민당 중앙선전부 소속으로 항일방송에 종사했기 때문에 일본 신문은 그녀에게 ‘교성(嬌聲) 매국노’란 이름을 붙였다.

하세가와 데루의 에스페란토 이름은 ‘베르다 마요’(초록의 5월)다. 충칭에서 한때 엘핀(본명은 안우생.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라는 조선인 에스페란티스트와 함께 활동했다. 엘핀은 그녀를 칭송하는 ‘평화의 비둘기’라는 시를 바쳤다.(졸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참조)

‘전쟁으로 미쳐버린 듯한 동양에서/ 늑대나 뱀 앞의 어린양같이 평화로운 그대는/ 발버둥치면서도 대담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 … / 아, 5월(마요)이여./ 이 섬뜩한 잿빛의 태양 없는 들판에/ 가을의 추수를 위해 초록색으로 훨훨 불타오르라.’(‘평화의 비둘기’)

후미코와 데루, 이 두 사람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국가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의 독립투쟁을 끝까지 벌였고, 식민지 지배민족의 일원이면서 피지배자와의 연대를 실천했다. 동아시아 평화구축이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두 사람의 선구자를 기억해야 할 때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다 치고, 지금 일본에서 이 두 사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인터넷상에 ‘조선인’ ‘한국인’을 표적으로 삼은 헤이트(혐오) 메시지나 평화구축 노력에 대한 무책임하고 냉소적인 코멘트가 난무하고 있다.

<박열>은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다만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점도 있었다. 이 영화는 박열의 열렬한 저항정신을 잘 묘사했으나 ‘그 이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없다. 일반공개용 극영화에서 그것을 묘사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과제다. 감독은 몹시 고민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전향을 거부한 채 옥중에서 자살했다. 박열은 1926년 지바 형무소에 투옥됐으나 9년 뒤인 1935년에 전향해 “저 역시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1935년 8월9일자 <동아일보> 보도)고 말했다. 1938년에는 현영섭의 내선일체론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에 찬동하여 “신속히 내지(일본)인과 합체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고 빨리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한일합병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고 표명했다. 1945년 일본 패전 뒤인 10월27일에 출소해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기로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더라도 나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다. … 이것은 폐하의 능위(천황의 위엄과 권위)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 10월에 친일파를 배제하고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되었는데 박열은 이에 저항하여 1946년 1월에 결성된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의 위원장에 취임했다. 건동은 우익 진영의 결집을 꾀하고, 같은 해 10월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을 결성했으며, 박열은 단장에 취임했다. 민단은 1948년에 결성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인받았다. 박열은 194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선전쟁(6·25전쟁) 중에 ‘월북’, 한때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요직을 역임했고, 1974년에 77살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상은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1996년 참조)

눈을 돌리고 싶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박열이 실은 유약했다든가 원칙이 없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박열조차 전향시켜버린 ‘천황제’라는 바닥없는 늪과 같은 장치에 대해 우리는 냉철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그 ‘장치’는 아직도 살아서 기능하고 있고, 여전히 평화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열의 저항정신을 단순화해서 영웅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좌절을 강요당한 쓰라린 진실도 직시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될 미해결의 난제가 여기에 있다. [번역/한승동 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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