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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나요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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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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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경 / 정치부 기자

   
 

1987년 중학교 1학년이던 내겐 6ㆍ10 민주항쟁의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그 해 1월 겨울 박종철이란 서울대생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대학가에선 데모가 자주 열렸으며, 전투경찰은 이들에게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다는 사실이다.

그 해 난생 처음 깁스를 했던 나는, 오월 어느 날 깁스를 풀러 가는 길에 데모 진압용 최루탄 냄새에 눈과 코가 따가웠던 기억은 선명하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그런 사건들을 거쳐 일반 국민들도 대통령 투표권을 손에 쥘 수 있었음을 인식했다. 박종철ㆍ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대학생 시위대와 전경이 부딪치던 엄혹한 풍경 때문일까. 영화 ‘1987’을 선택하는 데 한참 망설였다. 머리로는 6ㆍ10 항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시대적 아픔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라고 묻던 영화 속 연희처럼.

영화는 다행히 해피엔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고민과 회의 끝에 행동한 진심들이 모여 6ㆍ10 항쟁이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소수의 영웅에 의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다수의 평범한 이들의 노력이 한 땀 한 땀 이어져 역사를 움직인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그날이 오면’을 따라 부르면서 당시 거리로 나섰던 세대인 양 가슴이 벅찼다.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영화관을 나선 뒤 머리 속에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 시절 젊은이들이 꿈꾸던 ‘그날’은 6ㆍ10 항쟁이었을까? 전두환 정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이끌어낸 6ㆍ29 선언으로 마무리 되었을까? 현실에선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6개월 뒤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 군부 독재를 이끌던 전두환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6ㆍ10 항쟁을 이끈 민주세력의 분열 탓이었다. ‘정권교체’라는 이름을 그로부터 10년 뒤에야 붙일 수 있었던 이유다. 87년 이야기를 6개월만 더 그려냈더라면 영화는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 87년 6ㆍ10 항쟁을 주도한 86세대의 다수가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고 현 정부에서도 요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에서 정치권에 발탁됐고, 참여정부 당시 탄핵 바람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러나 30년 전의 뜨거웠던 열정에 비해선 그들이 보여준 정치적 성과는 도드라지지 않았다. 총선 때마다 당내 계파 수장에게 의탁해 정치 생명을 이어왔다는 비판도 들렸다.

그랬던 86세대 정치인들이 지난해 촛불정국을 거쳐 출범한 새 정부에 대거 중용됐다. 평범한 다수의 힘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촛불은 30년 전의 6ㆍ10 항쟁과 정확히 포개어진다. 그들은 촛불집회에서 87년 6ㆍ10 항쟁을 떠올렸고 당시의 감격을 되뇌었다. 하지만 영화 ‘1987’를 보고서도 이러한 낭만에 젖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87년 이후, 86세대들이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이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나. 청년들은 취업난에 신음하고 있고, 소득 격차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고용 없는 경제성장으로 성장을 체감하기 쉽지 않으며, 그로 인해 다수가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품은 채 살고 있다. 정권 교체만으로 우리가 꿈꿔온 세상을 단숨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87년 이후 누구나 알고 있다.

문득 86세대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선배들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나요? 젊은 날 지켜내려 안간힘을 썼던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그러하다면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 속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다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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