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윤 / 태평양고문·전 금융위원장

북한 핵개발 등 안보문제에 가려져 있지만 최근 경제 분야에서 주변국과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한일 통화스왑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한국이 요청해 오면 재개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먼저 굽히고 들어오란 얘기다. 중국은 사드 배치를 구실로 자국인의 한국 관광을 사실상 금지했다. 미국의 군사시설에 대해 애매한 한국을 트집 잡은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다. 얼마 전 미국은 사실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일 한미 FTA의 폐기 논의까지 언급했다.

그들 나름대로의 속사정은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소위 `러스트벨트(RUST BELT)`로 대변되는 자동차, 철강 등의 침체된 산업을 살리겠다고 공약했다. 당선에 기여한 백인 저소득층을 의식한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로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상태에서 전선을 넓히지 않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직접 힘을 겨루기는 버겁고 한국이 만만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보수층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 항상 그랬듯이 일본 지도층은 국내가 어려워지자 이웃인 한반도를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감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산 자동차 불매운동이 도를 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여행을 자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에서는 소위 혐한감정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한류에 대한 열기가 식은 지 오래다. 우리가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고급기술이 중국의 짝퉁제품에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한 데 이어 중국은 무역전쟁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정작 갈등의 내용을 따지고 보면 서로에게 아무런 경제적 실익이 없다. 한 연구기관의 추정에 따르면 사드 규제로 인한 중국 관광업계의 손실만 연간 1조원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중국도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국의 자동차나 철강 산업이 한미 FTA 재협상으로 살아날 리 없다. 일본의 일방적 통화스왑 중단은 금융시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국제금융계에서 일본의 신뢰만 떨어뜨렸다. 아시아 지역 내의 금융안전망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M)`에 대해 의구심마저 생겼다. 절대적 지분을 갖고 있는 일본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최근의 사태를 정부 당국자끼리 대화와 협상을 통해 풀어내는 것은 어렵다. 어느 쪽이 먼저 허리를 숙이고 대화를 제안해야 하는 자존심 문제가 있고 상대방이 이에 응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정부 당국자들도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서로에게 엄청난 손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체면이 손상될까 두려워 먼저 나서지 못하는 `체면 리스크`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럴 때는 민간이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 간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 정부 대신 민간이 나서는 경우가 흔히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인 2010년에 선진국과 신흥국 간 `국제수지불균형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무역과 투자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세계 유수의 기업인들은 G20 서울정상회의에 앞서 보호무역주의 철폐와 국경 간 투자규제 완화를 강하게 건의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가 열릴 즈음이면 각국의 금융관련 단체가 공동으로 그들의 의견을 전달하곤 한다.

우리나라에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가진 경제단체나 싱크탱크들이 많다.무역협회나 민간 연구기관 등이 미·중·일의 경제단체나 학계 등과 연계하여 각국 정부에 공동 건의서를 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체면 리스크`에 걸린 정부에는 출구전략을 시행하는 명분이 생길 것이다. 조만간에 미국 재무부의 환율보고서가 발표되고, 오는 10월 10일에는 560억달러에 달하는 한중 통화스왑의 만기가 돌아온다.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