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 / 워싱턴 총국장

트럼프 돌출발언 봉쇄한 아베와 시진핑
사드 이어 ‘칼빈슨함 청구서’ 날아올지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에서 ‘사드 청구서’ 발언이 나오기 며칠 전 백악관 주변에서 흘러나온 또 하나의 ‘괴담’이 있었다.

‘칼빈슨함 청구서’. 발신자는 트럼프, 수신자는 문재인 차기 대통령. 내용을 정리하면 이랬다.

“핵항모 칼빈슨함이 예정을 바꿔 한반도에 배치됐다. 항모전단 구성은 이렇다. 핵추진 잠수함 2척이 선두에 서고 이지스 구축함 ‘웨인 E 메이어함’과 ‘마이클 머피함’이 뒤를 이었다. 그 뒤에 칼빈슨 항모가 서고 유도미사일 순양함 ‘레이크 템플레인함’이 호위했다. 한반도 운영 기간은 약 1개월. 이하 청구서 내역: 칼빈슨 항모 운영비 375억원, 잠수함 2척에 50억원. 구축함 2척에 50억원. 순양함 1척 30억원. 총 한 달간 운영비 505억원을 한국 정부에 청구한다.”

사드 배치도, 칼빈슨함 항로 변경도 우리가 요청한 게 아니다. 미국이 요청하고 정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 머리’의 회로는 철저한 수혜자 부담에 맞춰져 있다. 가치보다 이익이다. 아무리 사드 계약서를 들이밀어도, 한·미 동시 수혜론을 펴도 소용없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말에 흥분하고 나설 필요는 없다. 트럼프 입이나 트위터에서 나온 외교 발언 중 제대로 이뤄진 게 없기 때문이다.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재단 대표는 “일단 무시하라.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해 뭔가 깨닫고 배우면 백이면 백 모두 입장을 바꿨다”고 조언한다. 실제 트럼프 입에선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몰고 관세를 45% 물린다는 말이 사라졌다. ‘하나의 중국’ 정책을 손보겠다 하더니 이제는 대만 총통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대일본 무역적자 해소와 방위비 분담금 증가 주장은 자취를 감췄다. “쓸모없는 조직”이라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튼튼한 동맹”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건 트럼프가 그냥 순순히 바뀐 게 아니란 점이다. 그렇다고 그는 각료나 전문가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사람이 아니다. 얼마 전 백악관 관계자가 들려준 일화 한 토막.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백악관에 들어와 트럼프에게 ‘터키 브리핑’을 했다. “터키가 러시아에 다가서고 있다. 뭔가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트럼프가 3분도 채 안 돼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데, 자네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왜 그리 파워가 있는지 아나? 바로 트위터 때문이야. 쿠데타를 진압한 것도 트위터를 잘 활용해서지.” 이때부터 트럼프의 ‘트위터 예찬’ 강의가 브리핑 끝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트럼프 입에서 ‘쓸데없는 말’ 나오지 않게 막은 이들은 정상이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저자세’로 트럼프 마음을 사로잡았다. 2월 초 아베가 트럼프를 만나자마자 건낸 첫 말은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였다. 영문을 몰라 트럼프가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의 협상술 덕분에 F-35 구입비를 1억 달러 아낄 수 있었다”는 답변에 트럼프는 “당신, 맘에 든다”고 했다. 일본 고위 소식통은 “다음날 5시간 동안의 골프 중 트럼프는 30분마다 버락 오바마 험담을 했다. 그때마다 아베는 꾹 참고 아무 반론도 안 했다. 대신 먼 산을 바라보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곤 하이파이브를 연발했다”고 귀띔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특유의 진지함으로 트럼프를 설득했다. 어떤 엉터리 역사 강의를 했는지 모르나 어쨌든 트럼프에게 ‘깨달음’을 줬다. 요즘 트럼프는 시진핑을 “내가 크게 존경하는 분”이라고 지칭한다.

답은 나와 있다. 정상 간 믿음의 힘만이 ‘수퍼 나르시스트’ 트럼프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아베식 ‘전략적 아양’을 택하건 시진핑식 ‘진지한 설득력’을 내세우건 뭐라도 해야 한다. 한국과 한·미 동맹을 이해시키고 트럼프 입에서 더 이상 우리를 불쾌하고 분노케 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일, 그게 바로 우리 국민이 일주일 후 탄생할 차기 대통령에게 건넨 첫 숙제다. 어영부영 이도저도 아니게 미적거리다간 ‘칼빈슨함 청구서’ 괴담은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