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 논설위원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 롯데백화점과 편의점 세븐일레븐 점포에는 중국어로 쓴 이 같은 홍보물이 나붙었다. 발길을 끊은 중국관광객(유커)을 향한 애틋하고 간절한 구애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최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사랑한다. 중국에서 계속 사업을 하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중국을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묘사하며 비위를 맞추기까지 했다. 해외 고객을 잡기 위해 무슨 일인들 못하랴마는 `회장님의 몸 낮추기`에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비장함이 느껴진다.

20년간 사업을 해온 중국 시장이 거덜 날 위기, 면세점을 꽉 채웠던 유커의 증발. 롯데는 지금 외교문제에 잘못 엮인 기업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극한 상황을 체험 중이다. 롯데가 중국의 뭇매를 맞게 된 것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용지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롯데가 자발적으로 용지를 내놓은 것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국가의 안보정책에 노(no)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롯데의 `사드 잔혹사` 시작은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사드 용지로 성산포대가 선정된데 대해 성주지역 민심이 들끓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지를 다시 물색해보라고 지시했다. 한 달 후 최종 낙점을 받은 곳이 성주 골프장이었다. 롯데그룹이 보유한 4곳의 골프장 중 유일하게 흑자가 나는 곳이었다. 기업으로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골프장도 골프장이지만 최대 파트너인 중국의 사드 반발이 거슬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급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물의를 일으킨 약점이 있고, 비자금 조성 혐의로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셈이다. 롯데는 자사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강제 수용 방식`을 원했지만 그마저도 관철되지 않고 1대1 토지교환으로 결론이 났다. `79일 만의 용지 변경`은 냉정히 말하면 기업에 희생을 요구해 얻어낸 성과였다.

이후 롯데에 엄습한 것은 `용지 제공=뇌물`이라는 야당의 비판, 토지교환이 배임이라는 주장 등이었다. 차기 정권을 잡을지도 모를 야당의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롯데상사 이사회가 두 차례나 연기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용지교환 계약 체결 이후 몰아친 후폭풍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 내 99개 매장 중 70개 점포 영업중지, 롯데제과 초콜릿 공장 생산 중단, 선양 롯데월드 공사 중단 등 보복은 교묘하고 잔인했다. 중국인이 매출의 70%를 차지했던 면세점 영업은 빈사 상태다.

답답한 것은 롯데가 중국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고 보복이 산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는데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으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텐데 증거가 없다"며 정부 차원의 항의는 어렵다는 미온적 입장이다. 미국 하원이 한국에 대한 중국의 사드 보복을 강력히 규탄하고 나섰지만 정작 우리 국회는 꿀 먹은 벙어리다.

아무리 대통령 궐위 상태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겁한 정부가 있을까. 국가가 떠안을 외교 부담을 기업에 전가해 놓고 기업 홀로 두들겨 맞는 것을 외면하는 정부. 또 한 번 `이게 나라냐`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드 샌드위치`가 된 롯데를 보고 어떤 기업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발 벗고 나서겠는가. "땅을 포기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사치(the luxury)"라는 신 회장의 말은 대한민국에서 기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절절히 보여준다. 안보사안을 여론에 밀려 변경하고 기업에 떠넘긴 나쁜 선례이기도 하다.

2012년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중·일 간 갈등이 불거졌을 때 중국의 불매운동으로 도요타, 혼다 등 일본 기업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2년여 동안 양국의 경제관계 경색이 막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정부 간 대화채널 가동이었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롯데가 플래카드를 내걸고 중국인 감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우리 기업에 노골적으로 보복하는 다른 나라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저자세로 일관한다면 열강들에 끼여 국민을 지켜주지 못 하고 우왕좌왕했던 구한말 대한제국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