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 논설위원

`요주의 인물의 이름을 적은 명부.` 블랙리스트(Blacklist)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우리 식으로 하면 살생부쯤 되겠다.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7세기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된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였다. 그는 혁명 가담자들을 모두 용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왕좌를 차지하자 무자비한 복수극을 벌인다. 그때 그의 손에 쥐여 있던 것이 찰스 1세를 처형하는 판결을 내린 법관 등 응징할 자들의 명단, 블랙리스트였다.

검은색은 예로부터 죽음, 악마, 마녀 등을 상징했다. 따라서 블랙마켓, 블랙컨슈머, 블랙스완 등 블랙이 들어간 단어 상당수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의 한국 버전인 살생부는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의 이름을 동시에 적었다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조선 단종 때 왕위 찬탈 사건인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한명회에게 대신들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만들게 하고 궁문 뒤에 무사를 배치해 입궐하는 이들 중 정적을 제거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역대 정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을 탄압한 사례는 적지 않았다. 명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코드가 안 맞는 인사들이 만든 대중가요나 책들을 금지곡, 금서로 분류한 것이 그런 경우다.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블랙리스트가 사라졌다고 믿었지만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관여한 것으로 지목된 인물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특별검사팀이 블랙리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그마치 9473명이나 된다. 시인 고은, 연극배우 손숙 등 문화계 원로뿐만 아니라 소설가 한강, 영화배우 송강호·김혜수 등도 포함됐다고 한다. 1만명 가까운 문화계 인사들을 `위험한 존재` 또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니 대체 누구에게 예술을 하라는 것인지 의문이다. 일부 문화계 인사들이 "내 이름은 왜 없느냐"고 항의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누구나 접촉을 원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범정부적으로 특정 집단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억압하는 것은 국가 폭력이나 다름없다. 블랙리스트 파동은 비판과 간언에 귀를 닫고자 했던 이 정부의 폐쇄적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니 문화융성, 창조경제, 파괴적 혁신이 공허한 구호에 머문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