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규/ 도쿄 특파원

2014년 6월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과 도쿄의 한 행사장에서 `리더십`에 관한 대담을 나눴다. 자메이카 출신인 파월 전 장관과 한국계인 손 사장은 이민을 통해 성공을 거둔 개인사를 거론하며 "우리 모두는 하나"라며 손을 잡았다. 미국 통신사 스프린트를 보유한 손 사장은 당시 T모바일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인수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고 있던 터라 손 사장은 미국 내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파월 전 장관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블룸에너지의 사외이사인 데다 그의 아들은 FCC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FCC는 인수를 승인하지 않았고, 손 사장은 큰 좌절을 맛봤다.

2년 반이 흐른 지난 6일 손 사장이 돌연 뉴욕 트럼프타워에 나타났다. 정확히 20일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등장했던 바로 그 장소에 이번엔 기업인 손 사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만난 손 사장은 약 45분간 면담을 마친 후 "미국에 500억달러를 투자하고 일자리 5만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을 위대하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트럼프 당선자는 공약이 달성된 듯 흥분된 어조로 손 사장을 치켜세웠다.

손 사장이 로비에 가득 찬 기자들에게 보여준 프레젠테이션 자료에는 `폭스콘`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손 사장과 트럼프 당선자의 만남이 끝나자마자 폭스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미 투자 검토 의사를 밝혔다. 폭스콘에 아이폰 생산을 위탁하고 있는 애플이 손 사장이 사우디아라비아 오일펀드와 조성하기로 한 1000억달러 펀드에 10억달러 출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손 사장의 대미 투자액 대부분은 이 1000억달러 펀드에서 나올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에게 `미국 내 투자` 압박을 받고 있는 애플이 이 펀드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 투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자사 인간형 로봇 페퍼의 생산을 폭스콘에 맡기고 있고, 아이폰 초기 일본 내 독점판매권을 따냈을 만큼 애플과도 특수 관계인 손 사장이 트럼프 시대를 대비해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큰 그림을 제안한 것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T모바일 인수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손 사장이 비즈니스맨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빠르게 전략을 세워 전격 작전에 나섰다는 얘기다. 트럼프 시대가 예측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기업인들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손 사장이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손 사장이 트럼프 당선자와 축배를 들고 있을 때,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모두 한자리에 모인 곳은 다름 아닌 국회 청문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