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필 / 논설고문

"우리가 남이가." 20여년 전 김영삼 후보의 비공식 캠페인 슬로건 격으로 회자됐던 말이다. 부산의 어느 식당에 모인 지역 기관장들이 YS지지를 결의한 가운데 나온 '명대사'다.

이 한마디로 영남권이 몰표를 던져 그는 대통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망국적 지역 감정 및 색깔론의 대표적인 구호로 지탄을 받지만 사실 찬찬히 되새겨 보면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보듬는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은 한국같이 지역정서가 그리 강하지 않다. 대신 피부 색깔에 따라 '우리'가 되기도 하고 '남남'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우리가 남이가, 같은 색깔 아닌가." 영어로 옮기면 '피플 오브 컬러(people of color).' 워낙 널리 쓰이다 보니 첫 글자를 따 'POC'라 부른다. 백인을 빼곤 죄다 POC다. 흑인도, 히스패닉도, 동양계도. 거대한 인구집단이어서 선거철이 되면 POC 표심에 따라 대권의 향방도 출렁인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TV토론 때도 POC가 새삼 주목을 끌었다. 트럼프가 대뜸 힐러리를 향해 "당신 'POC 대통령'이 될거냐"며 면박을 줬다. 소수계표를 긁어 모아 백악관 주인이 되겠다는 힐러리가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트럼프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POC와 척지고 백인표만, 그것도 가난한 중서부 백인들의 표만 믿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키웠으니.

근데 트럼프는 왜 느닷없이 POC를 들먹였을까. TV 토론이 있기 한달 전 쯤 어느 대학생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룸메이트 구함. 단 POC만 연락바람."

장본인은 클레어몬트 칼리지의 학생. LA인근에 소재한 명문 사립대학이다. 백인경찰관의 과도한 공권력 집행이 흑인 커뮤니티로부터 거센 반발을 일으켰던 즈음이어서 이 학생의 광고는 당장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소수계는 대체로 "POC끼리 지내야 맘이 편해질테니까"하며 긍정적이었으나 백인들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역차별을 당했다며. 이처럼 얼굴 색깔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트럼프가 이 논란을 대선판으로 끌어들여 힐러리를 'POC만 챙기는 후보'로 찍어내려 했지만 효과는 글쎄다. '비미국적'인 선거전략이어서다. 미국이 어떻게 옛 로마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 됐는데 이런 야비한 술수를….

로마가 대제국이 된 동력은 언어를 매개체로 한 다양성이다. 라틴말을 쓰는 한 유대인도, 북아프리카인도, 동양계도, 게르만족도 '우리가 남이가'하며 하나가 된 것. 소련도 한때는 제국을 꿈꿨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하나로.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연방은 갈기갈기 찢겨져 해체의 수순을 밟지 않았는가.

미국이 수퍼파워가 된 것은 건국이념을 충실히 따른 결과일 터. 이른바 '여럿이 모여 하나(from many, one)'다. 어디서 왔건 차별하지 않았다. 다양성을 인정하니까. 옛 로마와 거의 일치하는 대목이다.

200여년을 이어오던 건국이념이 요즘 이곳저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POC는 그들끼리, 현실에 분노한 일부 백인들은 그들대로 똘똘 뭉치고. 이번 선거가 POC와 백인의 대결구도가 될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POC도 많아야 할텐데 정작 본인은 이들을 강간범 따위의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으니.

그래도 미국의 강점이 무엇인가. 잘못된 길을 걷다가도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얼른 궤도 수정을 하는 나라 아닌가. 자정능력이 있어 미국의 내일은 여전히 건강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