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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길(Joseph Cho), 세리토스 시의원에게 듣는다!미주한인사회 정치력신장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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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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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사회 정치력신장의 주역
조재길(Joseph Cho), 세리토스 시의원에게 듣는다!

조재길, 그는 누구인가?

(1) 출생지: 충북 단양. 현주소: 12057 Camino Valencia, Cerritos CA 90703(1978-현재).
(2) 생년월일: 1944년 2월 16일(실제로는 1943년생).
(3) 직업: 언론인·작가·사업가. 그리고 시의원
(4) 가족관계: 부인 조숙혜(Lucy, 1948년생), 장남 조광석(Andy, 로욜라대 로스쿨 졸업·로펌 변호사·1973년
     생), 차남 조준석 (Tony, 조지워싱턴대 로스쿨 졸업·L.A카운티 검사·1975년생), 막내딸 조지아(Jennifer,
     예일대 로스쿨 졸업· 뉴욕 변호사·파리 소르본느대학 유학중·1976년생)
(5) 학력: 서울대 사범대학 졸업(1966),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 대학원 컴퓨터공학 수학(1975).
     세리토스대학 영어과 졸업(1977, 2001-2002), 중국 연변대학 역사학과 졸업(박사학위 취득, 2006)
(6) 경력: 공군장교 제대(1967-72), 오산고등학교(1967)·보성고등학교 교사(1972-73), 미국 이주(1974), 청
     소부·주유소 직원(1974), L.A카운티 전산국 프로덕션 컨트롤러(1975-78), 오디오 마그네틱사 컴퓨터
     프로그래머(1976-78), KS Realty Co. 부동산중개(1977-현재),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 발행인 겸 편집인
     (1981-91), ‘라성일보’ 발행인(1984), KS출판사 대표(1987-2002), 남가주언론동우회 회장(1985), 미주동
     포전국협회(NAKA) 부회장(1993-94), 통일마당 부회장(1995), 라디오 코리아(LA) 칼럼니스트(1995-97),
     남가주공군사관장교회 이사장(2002-03), 휴버트 H. 험프리 민주당위원회 이사 역임. 현재 캘리포니아
     주 Cerritos 시의원(2007-현재), 루시 & 조셉장학재단(Lucy and Joseph Cho Foundation) 공동대표(2004-
     현재), L&J 개발경영 대표(2004-현재)
(7) 저서 및 논문: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삼민사, 1990), ‘한반도 핵문제와 북한과 미국관계의 전망’(해외
     동포학자 민족통일연구소 북미본부, 1993), ‘한반도 핵문제와 통일’(삼민사, 1994), ‘통일로 가는 길이 
     달라진다: 한반도 통일환경의 변화와 평화체제 구축방안(방송칼럼집)’(오름, 1999), ‘북핵위기와 한반
     도 평화의 길’(한울아케데미, 2006)


   
인생은 7전8기라고 했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고, 또 쓰러지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오뚝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번 ‘OK TIMES’ 표지인물은 1980년대 한때 용공분자로 매도당했으나 1990년대 이후 북한핵문제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헤치고, 환상적인 통일대신 동북아평화를 위한 지역안보협력체제와 민족경제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사람이 2000년대 이후 미국 주류정치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250만 재미한인들의 정치력신장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연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이달의 주인공은 미국 남가주(Southern California State) 세리토스시(city of cerritos)에서 시의원(Councilmember)으로 맹활약 중인 조재길(趙在吉·1943년 충북 단양 出生) 박사다.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회장 임용근)가 주최하고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권영건)이 주관한 ‘제2회 세계한인정치인포럼’(2008.9.29~10.2) 참석차 만 1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그와 값진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 세리토스시, 희생자 및 애국지사 기념일 행사(2007.9.11)
▶ 세리토스시에 대해 소개해주신다면?

미국 L.A카운티와 오렌지카운티 중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서 최상의 주거·교육·문화 환경을 갖춘 도시이자 중산층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진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인구는 약 5만 명. 그 중 아시아계가 60%, 우리 한인들도 20% 정도 된다. 세리토스에 한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L.A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좋은 교육학군(ABC학군)과 주거환경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자세한 것은 http://www.ci.cerritos.ca.us/ 참조)

▶ 미국에 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1966)하고 공군장교로 복무(1967년~1972년)했다. 제대 후에는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잠간하다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고 1974년에 미국으로 갔다. 햇수로 만 34년이 되었다.

▶ 1970년대 미국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남들 고생하듯이 청소부 생활부터 시작했다. 주유소 직원으로도 있었다. 미국생활 3년 반 만에 L.A카운티 전산국 공무원이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원에 다녔다. 1977년 이후부터 부동산중개(KS Realty Co.)에 손을 대었고, 1980년에는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다. 당시 100만 달러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 유학생으로 시작해서 공무원으로, 부동산사업가로 자리잡아가던 분이 갑자기 반정부활동을 하게 된 이유는?
광주사태가 발단이 됐다. 1981년 초, 요즘 ‘교차로’나 ‘벼룩시장’ 같은 형태의 ‘주간 광고’라는 신문 발행을 준비(1981.2.3 창간)하고 있었는데 마침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창간호를 준비하다말고 전두환 방미반대시위 선봉에 서게 됐다. ‘주간 광고’는 몇 호만 내다가 제호를 아예 영문이름이던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1981-1991)로 바꾼 다음 당시 한국에서 발행됐던 모든 팸플릿들을 여러 경로로 입수해서 우리 신문에서 기사화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인용하여 다시 기사화했다. 아무튼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를 모시고 미국에서 민주화운동 대변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84년에는 일간지 ‘라성일보’도 발행했다. 신문제작에 매년 40만 달러씩 쏟아 부었다. 3년 지나고 보니 파산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어섰다. 그 후에는 신문기고가로, ‘라디오 코리아’(LA)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이렇게 언론인 생활을 1981년부터 1997년까지 했다.

▶ 당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이 남는 사람이 있다면?
고려대 신방과 교수(1971-89)였던 윤용 같은 분은 마치 통신원처럼 공중전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국내소식을 전해줬다. ‘USA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종속이냐 동반이냐’(1989)의 저자인 박경석 장군도 전역 후 미국에 와서는 “당신 신문을 보고 내가 세상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 선거구 앞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 반정부활동을 하다가 북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1988)이 계기가 됐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이 발표됐는데 제1항이 “남북동포간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자유왕래 개방”이었다. 해외에서 반독재민주투쟁에 앞장섰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을 바로 알기 전에는 민족화해도 통일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을 두 번 방문했고, 그때의 경험을 기초로 1990년에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를 펴냈다. 북한정치와 사회현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는지 대학교재(추천도서)로 쓰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고 하면 소위 운동권적 시각 때문에 논란이 많았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빨갱이’ 소리도 많이 들었다. 북한에 두 번씩 갔다 왔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꾸준히 신문기고와 칼럼리스트 활동에 매진했다. 사회운동 하는 ‘특수 언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 최근 북한핵문제가 미국이나 한국에서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관심을 갖게 됐나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1991.12.31) 이전까지 주한미군이 갖고 있던 전술핵무기는 1,000여 기가 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한반도 핵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마치 무풍지대와 같았다. 제1차 북핵위기(1993.3.12-1994.10.21)때는 13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대화와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했고, 김영삼 대통령
   
▲ 선거 당선 날 밤, 승리의 환호(2007.3)
의 미국방문(1994.11.30) 당시 그가 머무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무력공격반대시위를 하기도 했다. ‘한반도 핵문제와 통일’(1994)이라는 책은 그런 의미에서 펴냈다.

▶ 북한핵문제를 하루 속히 풀어야 할 텐데, 전문가로서 의견이 있다면?
흔히 한반도 핵문제를 북한의 핵개발로 제한하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핵문제는 21세기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우리 모두의 과제다. 북한의 핵개발·확산도 막아야 하지만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개편과정에서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이해를 극대화 하려는 미국의 대북정책도 우리 민족의 이해와 맞아야 한다고 본다.

1980년대 반정부활동가·언론인으로, 1990년대 북한문제전문가로 맹활약하던 조재길은 갑자기 자신의 인생진로를 바꾸게 된다. 흔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뱃속에서 한 번, 자신이 태어난 모국에서 한 번,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거주국에서 한 번. 이렇게 3번 태어난다고 하듯이….

▶ 갑자기 사회운동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다.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정권이 바뀌니 세상도 바꿔졌다. 그런데 갑자기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 매주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나 떠드는가?”라는 생각이 몰려왔던 것이다.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1997년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2001년까지 사업에 전념했다. 2002년 사업을 정리하고 중국 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 미국에서 중국으로, 그것도 연변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인데?
무엇보다 한국근대사를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연변대학은 중국, 러시아, 한국, 북한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가 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동양 3국이 어떤 근대화과정을 겪었기에 서로의 길이 달랐는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집중 연구했다.

▶ 다시 공부하면서 어떤 것들을 깨닫게 되었나?
많은 것을 생각했다. 특히 사회운동·민주화통일운동으로 돌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더 이상 민주화운동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미주한인사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미주한인이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역시 결론은 한인정치력신장이었다. 흔히 ‘미국 250만 교포, 남가주 100만 교포’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3선·공화당, 1992-1998) 이후 한인사회에서 미국 주류정치에 출마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이유는? L.A처럼 한인이 모여 있는 곳에서조차 한인정치력이 결집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던 세리토스지역은 한국계 20%, 중국계 15%, 필리핀계 11% 등 아시아계가 60% 되는 곳인데 1980년대 이후 시의원 5명 중 한 명은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주한인의 신흥중심지인 세리토스지역에서부터 한인정치력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연변대학에서의 공부만으로 그런 생각을 갖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다른 소수민족들의 정치력신장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나요?
물론이다. 원래 소수민족의 정치력신장은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이 기초다. 그런데 1990년 중반 이후 캘리포니아에서는 히스패닉계가 대거 당선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정치를 거의 히스패닉계가 주무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2001년 어느 날 ‘LA TIMES’ 기사를 보게 됐다. 소수민족, 특히 중국 화교들의 정치력이 갑자기 두드러진 이유가 분석된 기사였다. 알고 보니 갑자기가 아니었다. 당시 L.A카운티 내 시의원만 20여 명, 교육위원 15명, 주하원의원 4-5명, 조세형평국 의원 및 주재무감사관 등 수 십 명이 배출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계 미국인정치력신장연합’(CAUSE, Chinese American United for Self Empowerment, 2003년 Center for Asian American United for Self Empowerment로 개명. http://www.causeusa.org 참조)이라는 단체가 15년 이상 꾸준히 중국계 차세대를 발굴·훈련한 결과였다. 중국계 유명 사업가들로 구성된 CAUSE 이사회가 전화로 모금하면 10분 내 30만 달러는 거뜬히 모금이 가능했다. 결국 우리 재미한인들도 이런 활동들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 그렇다면 한인정치력신장을 위해 어떤 일부터 했나요?
우선 한인 집거지역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남가주지역에서 한인들이 20%대 수준인 세리토스, 라팔마(La Palma)와 10%대 수준인 플러튼(Fullerton), 부에나파크(Buena Park), 라하브라(La Habra) 등을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정치력신장을 역설했다. 모두들 공감했다. 그러나 출마후보자 섭외는 정말 어려웠다. 누구 하나 출마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주한인들은 한인 후보가 없으면 거의 투표를 하지 않는다. 미국선거에 관심도 없고. 결국 이 사람 저 사람 권유하다가 나라도 출마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록했다.

   
▲ 가족과 함께
▶ 출마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당선되기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가족 대부분이 출마를 반대했다. 아이들의 이유는 간단했다. “아빠, 그 영어 갖고 어떻게 시의원 하겠느냐?” “아빠, 세리토스 시청에 한 번이라도 가봤냐?” 아이들 운동하는 곳에 데려다 준 적이 한 번도 없던 사람이었으니 시청에 갈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들의 반대와 성격이 달랐지만 아내도 출마를 반대했다. “북한방문기 썼다고 빨갱이 소리 지겹게 들었는데 선거에 나가면 그 이야기 다시 나오지 않겠느냐? 이제 좀 조용해질 만한데….” 가족의 반대, 특히 아내의 반대 때문에 고심했다. 만약 아내가 끝까지 반대했으면 출마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아내가 “당신이 원하면 한 번 해보라”고 격려해줘서 출마할 수 있었다.

▶ 시의원 선거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았을 텐데?
시의원 당선은 꿈도 꾸지 않았다. 예전에 공무원 생활 3년 한 것 외에 나는 한국신문만 봤고, 한국말만 했고 한국 사람만 만났다. 영어로 연설 한 번 한 적 없었고, 영어로 하는 회의에 한 번 참석한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시의원으로 뽑아달라고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제대로 된 선거운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한인집거지역을 중심으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한인유권자등록운동만 했다. 간혹 필리핀인·베트남인·인도인 집을 방문하면 브로큰잉글리시로 투표를 권유했고, 백인 집을 방문하면 주눅 들어 도망가다시피 했다.

▶ 첫 선거 결과가 궁금한데, 몇 표는 얻었나요?
2003년 3월 첫 선거에서 2,600표를 얻었다. 투표율이 낮을 때는 보통 2,500표면 당선권이었는데…. 당시에는 몹시 창피했다. 당선자는 3,600표. 무려 1천표 차이가 났다. 그러나 유권자등록운동만 한 걸로는 성적이 괜찮았다.

당시 조재길은 박사과정 공부하랴, 시의원 선거 운동하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매학기(3월과 9월) 한번씩 중국 연변대학에 가서 출석수강, 토론 및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과제 토론한 것을 연구해서 논문을 제출하는 식으로 학점을 취득했고, 학기중간에 연변에 가야만 할 때도 있었다는 그는 2005년 3월에 또 다시 출마한다.

▶ 2005년도 출마 당시 상황은 어땠나?
이번에도 한인후보자를 물색했다. 그러나 아무도 출마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다시 출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선거운동을 후원해주기 시작했다. 중국인·인도인·필리핀인 등 소수민족연합회에서도 적극 도와주었다.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도와줬다. 표쏠림(bandwagon) 현상까지 일어나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반대 측에서 한인후보자를 내면서 한인표는 분산됐고,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측은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막판에 뒤집혀 200표차로 다시 낙선. 너무 허탈했다. 대대적인 당선축하 파티까지 진행하고 있었는데…. 지나친 자만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 승리를 자신하다가 패배했다면 충격이 무척 컸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선거 다음 날 선거사무소로 갔더니 완전히 쓰레기장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집사람이 우선 걱정됐다. “당선과 낙선은 천양지차인데…. 집사람이 과연 며칠 정도 끙끙 앓다가 일어날 것인가?”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이었다. 1시간 후쯤 집사람도 선거사무소로 나왔다. “다음 선거에도 선거 입간판 다시 써야 한다”며 시내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지역구민 집 앞에 세워놓았던 입간판을 모두 수거해왔다. 미국인들이 200표 차 낙선을 아쉬워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올 때마다 우리 부부는 “다시 출마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도 집사람의 지원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조재길은 두 번의 좌절 끝에 2007년 3월 6일, 마침내 세리토스시 최초의 한인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선거매니저가 “보다보다 너 같은 크래이지(crazy)는 처음 본다. 미국선거 출마자는 영어는 기본인데, 너처럼 영어 못해서 선거운동하면서 영어 공부하는 사람은 아직 못 봤다”고 놀릴 정도의 서툰 영어실력으로 재선에 성공한 로라 리 현직 시의원(3,880표)과 브루스 배로스(3,226표)에 이어 3위(3,207표)로 세리토스 시의원에 당당히 입성했다. 한인정치력신장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치열한 실천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본인 스스로를 ‘영어 못하는 후보자였다’라고 소개했는데…. 그럼 선거운동은 어떻게 했나?
   
▲ 제2차 '세계한인정치인포럼' 참석후 김형오 국회의장과 함께
선거캠페인 할 때는 생각만큼 영어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가 다 한 표다. 따라서 한 사람당 3분 이상은 시간낭비로 생각했다. 유권자의 말에 절대로 말려들지 않았다. “당신 말도 맞지만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3분 영어 몇 개를 준비했다. 후보자간 토론도 내가 제일 잘했다. 세리토스시 현안문제를 60개 정도 뽑은 다음 1-2분짜리로 예상답변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조건 외웠다. 그랬더니 7문제 중 6문제가 적중했다. 다른 사람들은 횡설수설하는데 나는 쟁점별로 요점을 정리하여 답변했다. 영어 잘한다고 토론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횡설수설하면 1분은 금방 지나간다.

▶ 당선축하가 대단했을 텐데, 어땠나요?
처음 2주 정도는 축하전화 받느라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2주가 지나면서부터는 기가 차기 시작했다. 세리토스 시의회는 직원들과 수많은 방청객들 앞에서 의정활동을 하게 되어 있다. 5명의 시의원이 높은 곳에 위치한 대법관식 의자에 앉아 업무를 봐야 할 뿐 아니라 세리토스 TV 3채널에서는 그 광경을 T.V로 생중계한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언제 그런 회의를 해봤겠는가? 그것만 생각하니 정말 그날로 도망가고 싶었다. “이러다가 한국사람 망신 다 시키는 것은 아닌지? 한국사람 앞길 닦는다고 해놓고서는. 나도 누구처럼 한인정치력을 후퇴시키는 것은 아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시의원’하면 시시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시의원은 어떤 활동을 하는가요?
시의원은 봉사 직이다. 그런데 미국정치에서 시의원 활동하기가 제일 어렵다고 한다. 프로 정치인인 연방이
나 주 상·하원의원에게는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보좌진도 있고 지역선거구에 없어도 무방하지만 아마추어
   
▲ 제2차 '세계한인정치인포럼' 참석
정치인인 시의원에게는 보좌진도 없고 혼자 일 처리를 다해야 하며 선거구에서 한시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L.A카운티에 88개의 시가 있다. 그런데 한인정치인은 나 하나뿐이다. 중국계 시의원은 20여 명이나 된다. 세리토스 시의원으로서의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가야 할 행사들이 너무 많다. L.A카운티 내 모든 한인행사가 그렇고, 세리토스 내 인도·중국 등 아시아계 커뮤니티 행사가 그렇다. 나를 지지해준 노조 행사, 내가 속한 민주당 관련 행사 등도 챙겨야 한다. 나만큼 많이 돌아다녀야 할 정치인도 별로 없을 것 같다.

▶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미국인들에게는 쓰레기, 교통, 수돗물 문제는 상식에 속하지만 나에게는 전문지식에 속한다. 그러다보니 매일매일 읽어야 할 것이 산더미다. 한국민주화나 통일문제는 내가 전문가지만 미국 실정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공부해야 한다. 시의회가 내놓는 의제(아젠다)마다 양이 너무 많고 거의 법률용어다. 그래서 사전 갖고 일일이 대조하면서 예습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 짧은 의정활동이지만 보람도 많았을 것 같은데?
지난 6월 25일에는 한미연합회(KAC)로부터 ‘성취상’을, 3월 27일에는 아시안마약남용방지기구(AADAP)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시의원 활동으로 상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인근 고등학교에서도 방청하러들 많이 온다. 그런데 유독 나한테만 사인해달란다(웃음). 개중에는 자기는 원래 정치에 관심 없었는데 시의회에 와서 보니 시의원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메일을 보내오기도 한다. 최근 시의원 중 한 명이 아파서 중도에 사퇴했다. 보궐선거에 4명이 입후보했는데 노조에서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현재 시의원 중에서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때 입후보자 4명중 3명이 나를 꼽았다. 대답 안 한 나머지 1명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꼽았다고 한다. 아무튼 한국사람 망신시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 최근 들어 한인정치력신장에 대한 관심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한인정치력신장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좀 쉽게 설명해준다면?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나 임용근 오레곤주 하원의원은 훌륭한 한국계 정치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분들을 한인정치력신장의 진정한 사례로 열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신호범의원이나 임용근 의원 지역구에는 한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분들 뒤를 이어 다른 한인들이 이들 지역구에서 선택받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한인들이 집거하고 있는 남가주 지역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우선 한인표가 많다. 세리토스시만 해도 한인유권자 등록표만 3,300표다. 이제는 누가 나와도 한인표만으로도 당선권이다. 라 팔마나 부에나 파크도 앞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한인 주하원의원이 나올 수 있다. 연방하원의원 배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것들이 남가주가 왜 한인정치력신장의 중심지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시의원 당선 이후의 한인정치력신장의 현주소는?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 이후 100만 명이 살고 있는 남가주에 한인정치인이 왜 한 사람도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출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인정치인신장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역사회를 위해 출마하겠다는 사람들부터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년 11월, 이민 1.5세 2명이 세리토스대학 평의회 이사로 당선됐다. 올해 11월 4일에 있을 남가주 선거에 7명의 한인들이 입후보했다. 앞으로 더 많은 1.5세-2세들이 미국 주류정치에 진출해서 미주한인사회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 이번 제2회 세계한인정치인포럼의 주제가 차세대정치인 발굴·육성이었다. 성과가 있었나?
서로 많은 시간 토론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당선 이후가 중요하다. 시의원이 되면 임명직 커미셔너(위원)를 10명까지 임명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당선 직후인 2007년 4월, 중국인·인도인·필리핀인·유대인·히스패닉 1명씩과 한인 5명(김흥식, 케네스 차, 이정섭, 미셀 윤, 수전 성)을 임명했다. 그동안 백인들 눈치 때문에 아무도 실천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시의원들이 놀란 표정을 짓기에 내가 반문했다. “시의원 5명이 10명씩 임명하면 모두 50명이다. 그중에 한인이 5명뿐이다. 뭐가 많은가? 당신들이 한인을 1명씩 임명하면 내가 한인 임명을 전부 철회하겠다”라고. 역시 미국 주류사회에서 정치를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 우리처럼 영어가 잘 안되는 이민1세보다는 영어에 능통한 이민 1.5세나 2세들이 주류정치에 진출해야 한다. 내가 임명한 5명의 한인 커미셔너들은 모두 각 지역에서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다. 화교들이 만들었던 CAUSE와 같은 역할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차세대한인정치인 발굴과 관련된 계획이 있다면?
내년 봄 L.A지역에서부터 차세대 정치세미나와 심포지엄을 시작할 예정이다. 어바인시의 강석희(부시장)·최
석호 시의원 등과 함께 내가 임명한 커미셔너들, 그리고 플러튼·라팔마지역의 출마희망자들이 참가할 것이
   
▲ 인도인 후원자들과 함께(2005.2)
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LA TIMES’ 보도처럼 CAUSE의 적극 지원 아래 화교 정치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당선되었다. 우리도 10-15년 꾸준히 노력하면 L.A 시의원 20명은 물론 주하원의원, 연방하원의원 배출도 충분히 가능하다.

재미화교들의 정치력신장운동에 자극받고 미국 주류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조재길 시의원. 화교들의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으며, 남가주 화교정치인 20여 명과도 교류가 활발하다고 한다. 경쟁할 때는 경쟁하고 협력할 때는 협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한국·중국·인도·필리핀·베트남 등 재미 아시안 커뮤니티가 나아갈 방향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 이명박 정부가 새롭게 출범했다. 본국정부에 바라고 싶은 말은?
본국이 우리 재미한인들을 잘 이용해야 한다. 특히 차세대들이 모국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제2차 세계한인정치인포럼에 내가 임명한 5명의 한인 커미셔너들도 데리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모국에 한번 오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모국에서의 모임만 고집하기보다 현지모임을 적극 지원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KAC(한미연합회)나 미주총련 그리고 각 지역 한인회들은 비영리조직이므로 유권자등록운동까지만 가능하고, 정치운동은 금지되어 있다. 차세대 정치인 발굴, 심포지엄교육, 출마권유, 재정지원 등 정치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체제가 우선 갖춰져야 한다.

▶ 재외국민 참정권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헌법은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단지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땅에 살면서, 그렇지 않아도 미국 주류정치 진출을 막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재미한인들의 모국정치지향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선거운동이 가능하게 된다면 미국 주류정치 진입 움직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면서 미국정치에 기여하는 것이 모국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나도 이것이 미주한인사회가 지닌 1차적인 임무이자 소명임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1980년 광주사태가 조재길이라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고, 젊은 가슴에 불을 질렀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올바른 방향은 아니었다. 재외국민 참정권 허용으로 이민 1세들이 더욱 한국지향적이 되고, 그로 인해 미국 주류사회진출 속도가 지체되지나 않을까 무척 걱정된다. 1970년대까지는 미국시민권을 얻으면 조국을 배반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생각들이 변하고 있다. 사회보장이 넉넉하던 시절에는 영주권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시민권자에게만 혜택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민권을 받고 있고, 유권자등록도 하고 한인후보 투표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외국민 참정권 허용이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오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 이중국적 허용에 대해서는?
각국 법률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중국적 허용이 한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현 국적법으로는 미국시민권을 따면 한국 사람이 아니다. 물론 한국에 와서 의무도 안하고 권리나 혜택만 누리는 사람들이 일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외국시민권자라 하더라도 재외동포는 한국의 자산이다.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국력의 확대와 국가위상의 제고를 생각할 때 장기적 차원의 재외동포정책이 필요한 때다. 중국 화교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중국경제의 활력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해외화교들이 중국발전에 기여하도록 유도하는데 중국정부가 화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공과 정성을 들였는가. 오랜 세월 투자하고 우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우리의 700만 재외동포 역시 결국에는 한국인이자 한국의 자산이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한다는 점에서 이중국적 허용은 적극 고려되어야 한다.

▶ 현지정착에 있어서 재미화교들과 재미일본인들간에 차이점이 있나?
재미일본인 공동체는 2차대전 이후 서로간의 결속력이 대단했다. 일본경제가 발전하면서 아시아계 공동체의 선두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 3-4세로 넘어가면서 미국 주류사회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에 반해 200년 이민역사의 재미화교 공동체는 여전히 중국 사람들로 남아 있고, 중국계 정치인들도 중국 사람일 뿐이다. 재미유대인공동체 역시 여전히 유대인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식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일본식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이민 2세-3세로 넘어가면서 한인커뮤니티가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자 의문이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아무리 중·고등학교 때 미국아이들과 놀고 영어만 쓰던 아이들도 대학 가서는 한국아이들과 놀고 한국어를 배우고 시집·장가가면 한국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보면 일본의 전철보다는 유대인이나 화교들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근대화를 서구화로 보고 쉽게 동화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중국은 근대화를 서구화로 보지 않기 때문에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나가고 있다고 본다.

▶ 앞으로 꿈이 있다면?
미국에는 두 종류의 시의원이 있다. 첫째, 지방유지급 시의원이다. 이들은 보통 70-80대로서 자신의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나보다 어린 시의원이다. 이들은 시의원을 연방하원의원, 연방상원의원으로 진출하는 디딤돌로 생각한다. 2009년 3월이면 세리토스시 부시장이 되고, 2010년 3월이면 시장이 되는 순번이다. 현재로서는 2011년 시의원 재선에 도전하고, 다시 한 번 시장을 하고 싶다. 물론 주변에서는 2012년 주 하원의원선거 출마를 권유하기도 한다. 아무튼 한인정치력신장운동은 미주한인들이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미래사업임에 틀림없다.

지난 3월부터 자신의 홈페이지(www.josephchophd.com; http://www.vote4cho.com)를 개통한 조재길 시의원. 그는 한달에 한번씩 월간 시정보고서를 발행하고 있으며, 약 5천 명에게 이메일로 서비스하고 있다.
현지 주류정치 진출을 목표로 하는 세계한인정치인포럼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와의 대담을 마치면서 미주지역에서 한인 출신의 연방하원의원, 연방상원의원의 출현도 머지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조재길 시의원의 진정한 친구가 되면 어떨까.

정리·글/황선구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소장
사진/최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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