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3.1.31 화 14:40
재외선거, 의료보험
> 정책/포럼 > 포럼
2008 교포정책포럼 : 제4주제
편집부  |  admin@oktime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9.09.28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편집자 주) 이글은 원문 및 발표내용을 요약하거나 편집한 것입니다.


제4주제 :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과제

배덕호 /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


< 목차 >

Ⅰ. 사할린 한인사회 현황

Ⅱ. 사할린 한인 역사
   1. 사할린 개요
   2. 사할린 한인 인구수
   3. 사할린 한인 이주, 전시 강제동원, 그리고 지독한 이별

Ⅲ.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 과정 및 입장들
   1. 일본 측
   2. 한국 측
   3. 사할린 한인단체의 목소리
   4. 제5회 재외동포NGO대회 현장 활동

Ⅳ. 과제 및 제언




Ⅰ. 사할린 한인사회 현황

1. 남사할린 한인분포 10개 지역별 현황 (아래 지도 참조)

   


                                    <2008년, KIN(지구촌동포연대) 제작>

1) 유즈노사할린스크 (Ю́жно-Сахали́нск) - 한인수: 16,000명(1세: 2,000명)
유즈노사할린스크시는 사할린의 주도(州都)로서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젊은 한인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과거 일본지배시 ‘토요하라’라고 불렸다. 현재 이곳에서 한글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곳은 7개 학교와 한국어교육원이다. 그 중 정규수업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곳은 ‘제9학교’ 한 곳 뿐이고, 나머지는 방과 후 과외활동 정도로 이뤄지고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 내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 수는 1,050명 정도 되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다음과 같다.
또한 이곳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는 일본정부의 예산으로 건설된 ‘한인문화센터’가 있다. 건물 내에 한인회와 한국교육원, 도서관이 있으며, 식당, 숙박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한인문화센터 입구에는 ‘사할린희생사망동포위령탑’과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2) 홈스크 (Холмск) - 한인수: 3,100명(1세: 108명)
사할린주 홀름스키군의 중심지이며, 인구는 3만3,500명이다. 일본이 지배했을 때는 마오카(일본어: 真岡)라는 이름이었다. 사할린 섬의 남쪽에 위치하고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83km 떨어져 있어 버스로 2시간여(110km)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항구도시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도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사할린에서 두 번째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다른 구역들에 비해 한국어 교육이 활발하다. 지방학교 중에서 한국어수업이 공식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학교로는 홈스크 '나제즈다 리체'가 있으며, 그 외 다른 학교에선 시간표에 한국어강좌가 들어가 있으며, 10년 동안 김인자 교사가 204명의 학생을 가르쳐 왔다.

3) 코르사코프 (Корса́ков) - 한인수: 2,700명(1세: 150명)
   
▲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
사할린 주 코르사콥스키 군에 속한 도시이며 오늘날은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항공편이 운항이 되지만 선박편만 있던 과거에는 사할린 섬과 홋카이도를 비롯한 외국을 연결하는 주된 교통요지였던 항구도시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래 사할린잔류 일본인들이 귀환될 때 이 코르사코프 항을 통해 귀환되었다. 그래서 과거 귀환의 소문이 있을 때마다 한인들이 고향에 가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가 결국에는 귀환하지 못한 채 남게 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4) 뽀로나이스크 (Порона́йск) - 한인수: 2,500명(1세:110명)
사할린 주에 속한 도시로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버스로 7시간, 기차로 10시간 떨어진 거리(288km)에 위치해 있다. 2007년에는 뽀로나이스크시 민속박물관에 한 곳을 할애해 한국관을 만들어 지역민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보존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뽀로나이스크시에서 차로 30여분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 한 공터에는 1945년 8월 18일, 일본 경찰에 의해 학살된 16명의 조선인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을 세운 이는 김경순 여사로 그 부친과 오라버니와 함께 학살되었던 한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위령비를 세웠다.

5) 우글레고르스크 (Углегорск) - 한인수: 1,340명(1세: 160명)
사할린주 우글레고르스키 군에 속한 도시이며, 인구는 1만 2800명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359km지점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서는 학교에서 5년 전에 한글수업이 있었고 교회에서도 한국어 강좌를 치렀으나 지금은 전무한 상황이다.

6) 돌린스크 브이코프촌
돌린스크시/ 일본지배시 ‘오치아이’라 불림 (한인 1,000명 / 1세 약 200여명)
브이코프촌 / 일본지배시 ‘나이부치’로 불림 - 한인수: 400명(1세: 48명)

   
▲ 한인들끼리의 형제서약서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브이코프촌은 과거 일제식민지시기에 탄광노동자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끌려간 탄광마을이다. 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와 상당히 가까운 편이지만, 마을 전체를 지탱하던 탄광이 문을 닫음으로 인해 마을의 경제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황이다. 이곳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혹독한 노동과 추위, 배고픔에 시달려야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으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함께 있던 조선인들과 ‘형제서약서’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줄 1세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단 몇 분만이 남아 계신다.

7) 샥쪼르스크 (Шахтерск) - 한인수: 660명(1세: 110명)
우글레고르스크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마을이며, 샥쪼르스크는 ‘탄부의 도시’라는 뜻으로 우글레고르스크와 함께 탄광마을로 많은 한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과거 일본지배시 ‘토로’라 불린 지역이다. 이곳도 우글레고르스크와 마찬가지로 접근성의 불편함과 낙후된 생활환경 등으로 인해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이다. 역시 일자리가 거의 없어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분들이 대부분이다.

8) 네웰스크 (Невельск) - 한인수: 500명(1세: 42명)
사할린 주 네벨스키 군에 속한 도시이며, 인구는 1만7,800명(2005년)이다. 소련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민족차별이 있어 한인들은 고위공무원이 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할린지역에서 두마(국회)의원이나 시장 등의 자리에도 한인들이 진출하고 있는데, 네벨스크시의 현임 시장도 한인이다.

9) 고르노자보드스크 (Горнозаво́дск) - 한인수: 460명(1세: 90명)
사할린 주 네벨스키 군에 속한 도시로 인구는 6만100명이다. 1947년까지는 ‘나이호로(Найхоро)’라고 불렸다. 사할린 섬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141km지점에 유즈노사할린스크가 위치해 있어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Ⅱ. 사할린 한인 역사

1. 사할린 개요

‘사할린’이라는 단어는 13세기 이곳에 들어왔던 몽골인 들이 붙인 이름으로‘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란 뜻이었고, 아이누인 들의 말로‘자작나무의 섬’이란 뜻으로 불렸다. 이후 제정러시아시기에‘악마의 섬’으로 수형지로 기능했다
사할린은 러시아 연해주 동쪽, 그리고 일본 북해도 북쪽에 위치한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에 속하는 섬이다. 러시아 행정구획상 사할린주(州)는 사할린 섬과 쿠릴열도, 그리고 그 밖의 섬을 포함하고, 유즈노사할린스크시(市한)가 주도이다. 면적은 87,100㎢으로 남한보다 조금 적다. 인구는 648,000(1996년)명이며, 100여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의 약 80%가 러시아인이며, 한인은 5.4%로 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할린은 원나라 이래 청나라 때까지 중국이 통치하여 왔는데, 서세동점 시기에 일본과 러시아가 이 지역의 장악에 경쟁하다가 1855년의 러․일 화친 조약에 의해 양국이 사할린을 공동통치하기로 하였다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러시아가 쿠릴 열도를 일본에 주는 대신 사할린 전체를 얻었다. 그 후 1904~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으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남사할린)을 할양받아 식민지로 건설하였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소련이 일본 영토로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대일 참전대가로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사할린이란 명칭은 러시아식 명칭(Сахалин)이고, 일본식 명칭은 ‘카라후토(華太)’이며, 중국식 명칭은 ‘고혈도(庫頁島)’이며, 영어식으로는 러시아식 명칭대로 ‘사할린(Sakhalin)’이라고 한다.


2. 사할린한인 인구수

1) 1945년 이전의 사할린한인 인구
  ① 1905년 남사할린 일본 할양 이전
      1897년 67명(제1차 전체 러시아 인구조사)
  ② 1905년 남사할린 일본 할양 이후
      1938~45년 :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으로 인해 약 15만 명의 한인이 사할린으로 강제동 원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이 한인 광산노동자 약 10만 명을 일본으로 재배치(이중징용)하였다고
      하나 이들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아직 도 알려지지 않고 있음.
      1945년 사할린 잔류 한인 수는 43,000명으로 알려져 있음.

2) 1945년 이후의 사할린한인 인구
    1989년 35,191명(사할린 전체인구의 약 5%에 해당)

3) 최근 시기별/지역별 사할린한인 인구수

지역

1991년

2002년(러시아비공식 인구조사)

1세 인구(2005년)

마카로브

1,521

737

784

579

105

돌린스크

1,442

712

730

1,522

215

토마리

872

429

444

597

56

아니와

1,235

624

611

543

100

브이코브

796

398

398

796

77

홈스크

3,630

1,807

1,823

2,706

112

코르사코브

3,779

1,808

1,971

2,460

200

뽀로나이스크

2,475

1,219

1,256

1,395

120

네벨스크

716

353

363

1,182

42

우글레고르스크

2,177

1,050

1,147

1,919

160

유즈노사할린스크

13,602

6,654

6,749

1,6086

2,100

루고워예

1,227

546

681

1,227

-

크라스노고르스크

439

240

199

439

20

샥쪼르스크

1,248

612

636

1,248

110

고르노자보드스크

720

358

362

720

90

스미르늬흐

285

152

133

252

40

띄모브스크

434

205

231

127

-

합계

36,598

17,904

18,518

33,798

3,547

 <출처 :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3. 사할린 한인 이주, 전시 강제동원, 그리고 지독한 이별

1) 사할린 한인 유민사
사할린에 조선인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70년대이며, 1897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전체 인구 조사한 결과 조선인 상주 자는 67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살다가 사할린에 이르게 된다.

2) 강제동원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부족해진 물자 조달과 노동력을 해결하기 위해 1938년부터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제정하여‘필요한 때에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법형식을 갖추어 놓았다.
요컨대 종전시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들은 절대다수가 현지징용을 포함한 강제동원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거나 그 가족들이었다.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일본이 아직도 그 명부 등의 자료를 공개를 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3) 이중징용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 남사할린지역의 탄광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부터인데, 그 후 철도와 도로가 마련되자 1940년대에 들어서서는 거대기업이 진출했다. 일본은 남사할린에서 채굴한 석탄을 수송선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남사할린에서 일본으로의 수송이 불가능하게 되자 남사할린의 석탄을 포기하고 일본 본토의 석탄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전환배치’또는‘이중징용’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중징용 이후 이들은 대부분 일본과 남사할린의 가족 간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특히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연락두절·생사불명의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다. 현재 밝혀진 것으로는 약 3,000여명의 한인이 전환배치, 즉 이중징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사할린에 남게 된 가족은 3,598명으로 추정된다.

4) 사할린 섬에 남게 된 한인들, 그리고 지독한 이별
그런데,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자 일본 화태청 장관(華太廳 長官)은 일본군의 요청을 받고 노유부녀자(老幼婦女子)등을 북해도로 긴급 소개시켰는데, 이 긴급소개는 소련군이 얄타협정에 약속되어 있었던 남사할린을 점령한 직후에도 계속되다가 8월 23일 소련군이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하기까지 약 보름동안 계속되었다. 이 출국금지조치에 의하여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도 함께 억류되었다. 이 긴급소개로 북해도로 건너간 사람은 약 76,000명이었는데, 이 중에는 소수의 한인도 포함되었다고 하나 그 숫자는 알 수 없다.

또한 당시 조선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전인 미군정 시기로 이들을 보호할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사할린에 있던 한인들은 일본으로도, 조국인 한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게 된 한인의 수는 4만 3천여 명이다.

5) 영주귀국, 60년만의 귀향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후 40여 년간 생이별을 한 한인의 나이 많은 부인들을 동반하여 일본국회를 방문하여 사할린잔류자문제를 호소하였고, 이를 계기로 1987년 7월 17일 일본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사할린잔류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회장 : 하라 분베에 의원, 사무국장 : 이가라시 고조 의원, 1987년 말 일본 국회의원 회원 155명)>가 발족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인만을 귀국시켰던 일본 정부가 사할린한인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남겨진 한인에 대한 귀국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사할린한인들의 귀환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양국의 적십자사를 통해 재정을 지원하여 1세들의 일시적인 모국방문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본격적인 영주귀국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1세 한인들의 평생의 꿈이었던 고향방문과 친척방문이 실현되었으며 2007년까지 2,221명의 1세분들이 영주귀국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정부는 2008년, 2009년까지 3개년에 걸쳐 대규모 영주귀국사업을 진행할 예정으로 있다.

<연도별 영주귀국 현황>

연 도

영 주 귀 국 (남/여)

개 별

사랑의집

대창
양로원

100가구임대 아파트

  사할린동포    복지회관

안산아파트
(고향마을)

안산
요양원

1989년

 

1990년

2(1/1)

1991년

7(6/1)

1992년

15(13/2)

77(69/8)

1993년

2(2/0)

42(30/12)

1994년

8(5/3)

45(24/21)

1995년

2(1/1)

1996년

9(4/5)

35(14/21)

1997년

1(1/0)

25(10/15)

18(9/9)

1998년

6(2/4)

146(65/81)

1999년

15(6/9)

80(15/65)

2000년

1(1/0)

11회 408세대

816(327/489)

2001년

16(2/14)

156(51/105)

6(0/6)

4(2/2)

2002년

2(1/1)

8(4/4)

2003년

7(2/5)

2(1/1)

2(1/1)

2004년

8(1/7)

14(4/10)

21(10/11)

2005년

4(2/2)

1(0/1)

17(8/9)

15(3/12)

2006년

6(3/3)

4(1/3)

21(7/14)

3(2/1)

2007년

8(2/6)

36(14/22)

인천 논현동 임대 아파트 입주 : 582명(199/383)

합 계

52(35/17)

154(113/41)

121(48/73)

328(129/199)

115(23/92)

925(373/552)

18(5/13)

2,295

 <대한적십자사, 2008.03.>

그러나 영주귀국의 조건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항목이 있어 자식들을 사할린에 두고 혼자만 와야 하게 되어서 새로운 이산가족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2인 1세대를 이루어야 하므로 부부 이외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한 집에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향땅에서 돌아와 살게 되었다는 기쁨은 잠깐이며 또 다른 그리움과 불편함을 크게 느끼며 한스러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Ⅲ.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 과정 및 입장

1. 일본 측
1995년, 일본 여당내 ‘50년프로젝트팀’에 자문하고 동 프로젝트팀의 결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게 되는데, 프로젝트팀이 결정한 전후 50년 일본정부의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지원정책의 기본방향(소위‘50년 파일럿 프로젝트’라 명명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1.일본정부는 영주귀국 비용을 부담한다.
2.일본정부는 영주귀국자(독신자, 노부부, 가족사람)의 거주시설 건설 및 운영비를 부담한다.
3.일본정부는 영주귀국 후의 생활비를 자급하여 일본정부가 설치한 기금으로 연금 지불 혹은 일시금을
   지불한다.
4.일본정부는 사할린 잔류 선택 자들에게 대하여 영주귀국 희망자들과 동등한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예를 들면, 잔류 자들에게는 일시금 지불, <문화교류센터> 건설 등을 고려한다.
5.일본정부는 사할린-한국간의 상호왕래를 위한 지원을 한다.
6.일본정부는 사할린에서 소식불명자들의 생사확인을 위한 조사 및 사망자 유골상환을 실행한다.
   (1995년)


과거 2000년 안산 사할린고향마을 건물 건립비 등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모국방문사업과 한인 영주귀국사업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했던 일본 측은 더 이상 재정 지원을 꺼려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상황이며, 영주귀국 사업이 시행된 지 십 수 년 동안 귀국을 기다리던 한인 2천여 명을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정부는 2000년,‘사할린 한인문화센터’건립 관련 5억 엔 제공 결의, 2007년 재개된 대규모 영주귀국사업과 관련하여 항공료 부담 및 초기 영주귀국 정착 관련 일회성 물품 및 생필품 지원 등으로 소위 ‘인도적 지원’의 역할조차 마감하려 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2003년 이후 영주귀국 사업을 위한 추가지원 요청에 대해 일본정부는 자국의 예산 사정 등으로 대규모 추가 지원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2. 한국 측
2005년 정부는 6월과 8월에 걸쳐 정부합동조사단(외교부,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대한적십자사 등)을 구성하여 잔류 사할린 한인 1세들에게 희망하는 지원내용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과의 협의를 거쳐 영주귀국 확대사업을 추진 중임을 밝히고 있으나, 구체적인 실태조사 내용에 대해서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최근 정부는, 영주귀국 시범사업 이후에는 기존 시설에 발생한 공가(空家)를 활용하여 영주귀국사업을 진행해왔으나, 사할린 현지 대기 중인 영주귀국희망자를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하는 점과 대부분 고령인 동포 1세들에게 조속한 영주귀국 실현이 중요하다는 판단 하에 일본정부와 협의를 거쳐 2007년도부터 기존의 공가위주로 시행해오던 영주귀국사업을 대폭 확대하여 실시키로 하고 주거 및 예산확보 등의 조치를 준비했다고 하며, 2007년도에 인천지역으로의 611명 영주귀국을 실현하고, 2008년도에 650명의 영주귀국을 추진(김포, 아산, 부산, 화성, 청원, 원주 지역 등)하고, 2009년도에 영주귀국사업을 종료할 예정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정부는 2005년 한일외교문서 공개 후, 1965년 체결된‘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하여‘75년 정부보상의 미흡함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국가가 도의적, 인도적 차원의 지원책을 마련하여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위로금 지급 등의 지원책을 발표하였으며(2006.3월),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을 제정하고(2007년.12.10),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를 발족(2008.6.18)했다.

그러나 그 지급대상에서 ① 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계속하여 일본에 거주한 사람 ②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 아니한 자 등을 제외시켰다(법 제7조-외로금 등 지급의 제외). 그 제외 이유로 ① 에 대해서는 과거 ’65년 청구권협정 문서에서“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기본조약 체결일)까지 일본에서 거주한 사실이 있는 사람의 경우 청구권협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있었고, 일본이 재일외국인에 대해 2000년도에 지원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사망자 1인 260만 엔, 부상생존자 1인 400만 엔 지급). 또한 ②에 대한 제외 사유에 대해서도, 지원법은‘75년 보상의 미흡함을 보완하는 의미의 도의적,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고, 국적조항이 없으면 북한, 중국, 사할린 등에 거주하는 사람까지 지원대상이 되어 지원에 복잡한 면이 있고, 국내 생환자에 대한 지원이 미약한 어려움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3. 사할린 한인단체의 목소리
2007년 3월 사할린 한인단체들(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주노인협회,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하바롭스크 극동한인이산가족협회, 모스크바 지역간사회단체사할린한인협회, 나부지역대표 로스토프사할린동포회, CIS지역대표 카자흐스탄사할린향우회 등)이 밝힌 결의문에서, ① 2004.12.3일, 2006.1.21일 사할린 한인동포단체대표자회의가 채택한 대일본정부 결의문이 정당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조속한 해결을 재차 요구한다 ② 일본정부는 사할린 한인이 겪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즉각 해결하라 ③ 강제연행 피해자인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한국에서의 주택건설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임대료를 보장하라 ④ 강제연행 피해자인 사할린 한인들이 러시아나 CIS지역에 계속 거주를 희망하는 자들에 대해 매월 US 300달러의 생활비 및 의료비를 지급하라 ⑤ 일제식민지 정책의 피해를 입은 사할린 한인들을 위하여 강제 집행된 우편저금, 애국적금, 각종 채권 등을 현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사할린 한인 지역 특별기금을 조성하라 ⑥ 사할린 한인의 일시모국방문 및 영주귀국 동포의 사할린 가족 방문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라 ⑦ 일시모국방문 및 영주귀국시 1세대 동포 참가자의 친족이 동반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⑧ 영주귀국 및 일시모국방문 사업에 1945.8.15일 이후 출생자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⑨ 본 결의문이 조속히 이행되도록 러시아 및 한국정부에도 협조를 요청한다 등이 대표적인 목소리이다.

<과거 연도별 사할린동포 지원 사업 예산 현황>

연도

수 입

지 출

잔액(누계)

일 적

국 고

이자등

31,746,496,136

29,281,841,809

1,918,887,392

545,766,935

28,290,154,776

27,198,937,428

1990

474,438,340

340,538,240

133,900,100

-

474,438,340

0

1991

664,900,623

516,591,331

148,309,292

-

443,861,137

221,039,486

1992

922,898,934

769,938,934

152,960,000

-

747,532,543

396,405,877

1993

972,861,200

824,838,200

148,023,000

-

826,604,714

542,662,363

1994

1,004,460,369

867,160,369

137,300,000

-

970,673,607

576,449,125

1995

1,107,000,462

982,200,462

124,800,000

-

1,094,038,870

589,410,717

1996

1,159,720,667

1,034,125,667

125,595,000

-

1,350,165,306

398,966,078

1997

1,888,416,775

1,780,416,775

108,000,000

-

1,348,071,125

939,311,728

1998

7,585,325,802

7,465,325,802

120,000,000

-

4,953,880,000

3,570,757,530

1999

2,052,497,694

1,932,497,694

120,000,000

-

4,031,054,475

1,592,200,749

2000

5,028,316,945

4,908,316,945

120,000,000

-

2,998,308,422

3,622,209,272

2001

3,840,580,439

3,525,383,226

120,000,000

195,197,213

2,885,113,125

4,577,676,586

2002

264,531,206

-

120,000,000

144,531,206

1,491,460,286

3,350,747,506

2003

1,547,551,659

1,311,931,728

120,000,000

115,619,931

1,533,540,114

3,364,759,051

2004

3,232,995,021

3,022,576,436

120,000,000

90,418,585

3,141,412,712

3,456,341,360

<대한적십자사, 단위 원>


Ⅳ. 과제 및 제언

2008년 올 해는, 1938년 남사할린으로‘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된 지 70년을 맞는 해이다.
지난 구소련시기 그리고 한소수교 이래 16년 동안, 4만여 명에 달했던‘강제동원 1세’들은 모두 타향에서 한스런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고, 향후 수년이 지나면 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할 사람도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3만여 명에 이르는 남사할린 한인들, 그리고 이 시간에도 자녀들과 생이별을 경험해야만 하는 영주귀국 한인들도 이미‘강제동원 1세’가 아닌 그들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 이 통한과 비극이 얼마나 큰 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앞서 밝힌바 같이 이곳 한인 후손들이 머나먼 러시아 사할린 주에 인구의 5% 정도를 유지하며 거주하게 되는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과거 일본의 식민지 강점 및 한인 강제동원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으며,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70년의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인 공식사과와 배상, 원상회복의 의무 등 법적 정치적 책임이 그대로 남아있음은 물론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문제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이주되었다는 점과 전후 수십 년간 귀환할 기본 권리조차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사할린 한인의 문제는 소위 구소련지역의‘고려인’의 문제, 혹은 일본의 재일동포의 문제와도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정부는 사할린 한인 문제에 대해,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 및 원상회복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면서도, 과거 수십 년간 일시모국방문, 영주귀국실현,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건설 등으로 문제는 해결됐고 인도적,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나설 판이다. 한국정부 또한 문제의 일차적 책임이 일본정부에 있음을 강조하며, 과거 일본정부의 소위‘인도주의 정책’에 손발을 맞추고 사할린한인들의 절규에는 귀를 막고 있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사할린 한인의 문제에는 구소련국의 책임 및 북한의 책임 소재도 가려야 하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향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사할린 한인사회단체간의 분열도 문제해결을 지연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받기에 충분하다. 한국정부(적십자사 혹은 재외동포재단)의 지원금을 둘러싼 이합과 집산, 법적인 책임을 부인하며 인도적인 지원책만 강조하는 일본정부에 대한 의존적 행태가 그것이다. 한국정부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나, 특히 일본정부는 자국의 정책을 충실히 수용하는 일부 단체에게 한인문화센터의 운영권을 할당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화에서 특정단체만을 상대하는 등 사할린 한인사회단체 분열의 핵심 장본인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끝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제언으로 끝맺고자 한다.

첫 째, 사할린 한인동포의 영주귀국 대상 범위 및 귀국한 자에 대한 지원책, 사할린 잔류 한인들에 대한 형평성에 맞는 지원책 등 관련된 국가의 책무 등을 규정하는 특별법 제정 및 관련 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일본 례,‘중국잔류방인등의원활한귀국의촉진및영주귀국후의자립의지원에관한법률’사례 참조) 특히 사할린 잔류 한인 1세들에 대한 자세한 실태를 파악하여 국내 영주귀국한 자에 대한 지원과 마찬가지의 별도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둘 째, 남사할린 전역의 한인 생활실태에 대한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대규모 실태조사가 필요하며(97년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의뢰하여 진행한 선례가 있음), 특정단체가 아닌 사할린 한인(사회단체)의 총의를 모으고, 즉 (일본정부 혹은 한국정부에 대한) 단일한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시급히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즉 사할린 한인사회단체간에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을 위한 단기, 중기, 장기 과제 및 단일한 요구사항을 공식적으로 정리하여, 더 이상 사회단체 간 분열양상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07년 사할린에 개설된 영사관이 그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셋 째, 정부는, 남사할린 전역에 걸쳐 소실되어가는 사할린 한인들의 강제동원 70년의 역사와 한인문화를 기억하고 보존할‘사할린한인 강제동원 역사기념관’을 시급히 사할린 현지에 건립해야 하며, 역사교과서에 강제 동원된 사할린 한인 역사를 반드시 수록해야만 한다.

넷 째, 민간과 공동으로 정부는 분명한 입장과 원칙을 가지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제외된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에 대한 청구권 협상을 통해, 유가족 및 그 후손들에 대한 보상 및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동시에 일본국의 법적 역사적 책임을 묻는‘역사소송’을 진행시켜야 한다. 또한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는 정부차원의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다섯째, 사할린 한인들이 모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이산가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영주 귀국한 한인동포 및 사할린 잔류 한인들에게 우선적으로‘이중국적’을 부여하는 방안을 시급히 강구하여야 한다.

여섯째, 사할린 한인 미래세대에 대한 우리말과 글, 문화 교육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기존 국내 영주귀국동포(약 2,200여명)를 대상으로 하는‘가족이주사 및 생활사 쓰기’등의 캠페인을 전개하여, 사할린 한인 이주 역사가 충실히 기록되고 전승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종로19(르메이에르 종로타운) B동 1118호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아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 | 편집인 : 이구홍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혜민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