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도 수 / 재미동포 자유기고가

오늘이 5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5월은 소망적이며 사랑스럽다. 그래서 노천명 시인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불렀고 정비석은 5월을 사랑과 희망의 계절로 찬미하였다. 그래서 5월은 바쁘다. 선남선녀들은 5월의 신랑신부됨을 선호하며 대학들은 메이퀸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에게 5월은 그렇게 소망스럽지도 사랑스럽지도 여왕 같지도 않았다.

보릿고개! 이 말은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로 지은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는 5~6월에 식량이 바닥을 보인다는 의미로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한다. 그리고 보릿고개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일제 36년 강점기였고 이는 일제의 무리한 식량수탈의 표출 현상 중 하나였다.

일제는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8년에 걸쳐 2040여 만 엔을 들여 전국의 택지, 농지 및 임야를 측량하고 소유주와 지가 지위 등을 조사하여 유사 이래 첫 지적도를 완성한다. 조선 침략의 영구화와 대동아전쟁, 조선의 쌀을 자국민용으로 충당하려는 고도의 계산에서다. 그리고 수탈의 원흉인 동척(동양척식회사)을 통해 한국의 땅을 야금야금 투기한다. 기록에 의하면 동척은 1917년 7만5178정보의 땅을 시작으로 1942년 말에는 20만7221정보의 한국 땅을 소유했다. 이를 농지로 환산하면 적어도 3천수백 만 마지기의 논밭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 농지를 농민에게 5할의 소작료를 매겨 소작하게 했다. 왕조 시대부터 이어온 농민의 토지경작권을 강탈해 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동척은 오뉴월 춘궁기에 굶어 부황 난 몰골로 몸져누워 있는 농민들을 회유하여 선심 쓰듯 장리쌀을 쓰게 한 뒤 가을 타작마당에서 2할의 이자를 거둬 가는 고리채사업을 공공연히 벌였다. 이러니 농민들의 수중에 남는 쌀은 전체 수확량의 24~26%에 불과한데 총독부는 여기에 각종 세금과 공과금, 수리 비용, 조합비 등을 덤터기 씌웠으니 보릿고개를 피해 갈 비책은 없었다.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30년 현재 춘궁기에 식량이 바닥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을 연장해 갔던 농가호수가 125만3000가구로 전체 농가의 40% 수준이었고 이들 농가의 75%가 평균 65원의 빚을 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빚은 3년 뒤에는 78%의 농가로 늘었고 빚의 평균은 115원으로 수직상승했다. 보릿고개가 별것인가? 죽지 못해 사는 민족의 아픔이 아닐까?

일제의 수탈과 민족의 아픔, 당시의 혼탁한 사회를 고발한 소설이 있다.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 17일까지 월간조선에 연재된 채만식의 '탁류(濁流)'다. 그 소설의 주요 무대가 지금의 새만금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군산이다. 소설가 채만식은 그가 나서 자란 군산이란 소도시를 관통하는 탁류를 보면서 민족의 애환과 한국의 부가 일본으로 향하는 안타까움을 바라봤을 것이다. 군산은 일제시대 일본과 소통하는 주요 해상기지였고 한국의 주요 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기차와 선박을 통해 일괄 운송할 수 있는 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몇 안 되는 한국의 도시였다. 그야말로 군산은 일제시대 한국 속의 일본이었다. 군산이 얼마나 일본의 쌀 수급처로 이름을 날렸으면 장미동.미장동.미성동.미륭동 같은 쌀 미(米) 자 들어간 이름을 지었을까 싶다.

요즘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소하다. 대신 '월급고개'란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단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월급 수령 후 평균 17일 안에 다 소진한다고 한다. 그러니 남은 13일을 초근목피로 견뎌야 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월급고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월 급여가 물가나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규모 없는 젊은이들의 헤픈 씀씀이도 한몫한다는 이야기다.

미국 생활도 마찬가지로 고개가 많다. 오히려 살면 살수록 예전에 겪지 못한 가파른 생활고, 육신의 질병, 자녀들을 향한 문제의 고개들이 등장한다. 고개 없는 세상, 고개 없는 5월이 좋겠지만 적당한 고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