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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매몰이냐 소생이냐-역사광복의 길 摸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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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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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윤 /일본·한민족문제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지난해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한 세미나에서 나는 “한·일 양국의 50주년을 조명하며 -재일동포의 바람직한 법적지위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한·일 국교 정상화(1965년)와 동시에 체결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는 원래 하나였던 재일동포 사회를 남북으로 분열시키는 분단협정이 되어버렸으니 일단 파기를 하고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재일동포사회를 하나로 묶고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법적지위를 남북이 함께 검토할 시기를 맞이했다고 판단을 하고 2007년 ‘10·4남북공동성명’ 제8항 (남북은 해외동포를 위하여 협력을 강화한다)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협의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한 바 있습니다. 특히 남측이 먼저 북측에 그것을 제의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해외동포와 조국과의 관계는 이와 잇몸과 같이 운명공동체까지 되기는 어렵지만, 아이와 엄마가 배꼽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세계화를 맞이하여 조국과 해외동포와의 보완관계를 강화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제언한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한·일 강제합방(식민지) 100년이 지난 지금 하나가 된 조국과 둥그렇게 연결된 해외동포사회, 즉 식민지 청산과 냉전체제를 극복하면서 새로 탄생한 하나의 조국과 전 세계에서 자랑스럽게 새로 태어난 한민족 후손들이 약진하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한, 또 재일동포가 남과 북의 이념대립에 빠지거나 영향을 받고, 게다가 일본의 동화정책에 몸부림치고 있는 한, ‘손에 손을 잡고’ 민족의 장래문제를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일본국적으로 귀화를 하게 되면 자연히 한반도의 통일과 한민족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생각하고 있는 동화정책과 딱 맞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구홍 이사장님께서 “유물이 된 ‘65년 법적지위’에 매달리지 말고 또 협의기구도 중요하지만 남과 북의 줄다리기에 영향을 받는 까닭에 제언 정도로 해 놓읍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 오히려 한일 관계와 식민지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100년을 내다보고 ‘재일동포 매몰이냐 소생이냐’라는 쪽으로 기조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매몰이냐 소생이냐’라는 제목을 듣고 놀랐습니다. 놀랐다고 하기보다는 겁이 났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2세로서 여든 살을 눈앞에 두고 자식들은 걱정이 없어도 손자, 증손 후까지 한국인으로써 아니 국적은 별도일지라도 계속 한민족의 후손으로 민족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재일동포에 대한 나의 솔직한 불안감입니다. 이런 불안감을 안고 어떻게 100년 후의 재일동포사회를 올바르게 내다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80년 가까이 일본 물을 마시면서 24시간 일본말만 들리는 환경 속에서 자란 2세입니다. 조국이 하나가 되면 일본에서 조금은 떳떳하게 살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재일동포사회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65년 법적지위’를 없애고 재일동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법적지위’를 다시 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2세일뿐입니다.
하물며 미래학자, 역사학자도 아닌 제가 100년 후의 재일동포사회를 무슨 말로 이야기를 하란 말입니까. 말하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심각한 현실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구홍 이사장님이 또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재일동포는 물론 750만 해외동포와 남북을 합쳐도 한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없는 대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생깁니다.”라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오늘 이 자리에서 학자도 아닌 제가 염치없이 발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역사 광복의 길

9월 초, 부탁을 받고 나름대로 원고를 썼지만 도저히 발표할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썼던 원고를 그냥 쓰레기통에 쑤셔박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원고도 쓰고 강연도 할 수 있는데… 하고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10월 중순이 지나서 국사교과서가 검정에서 국정으로 바뀐다는 보도를 일본 TV뉴스에서 봤습니다. 이것이다. 역사를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1945년 대일본제국의 패전으로 조국이 해방되었으면 3000만 한민족은 누구 한사람 빠짐없이 사상과 입장을 떠나서 남의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상적인 새조국 건설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 한민족의 나아갈 길이며 그것이 바로 민족의 도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 남(8월 15일 대한민국)과 북(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둘로 갈라진 채, 한국만이 1965년 일본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바로 이 선택이야말로 성급하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 견해에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일국가를 수립한 다음 일본과 국교를 맺는 것이 민족의 도리이며 순서였던 것입니다.
사실 계엄령까지 선포하면서 많은 학생, 지식인들의 반대 속에 국교가 맺어졌습니다. 또, 일본도 종주국의 책임으로서 하나가 되는 한반도를 기다리고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도리인데도 불구하고 남쪽하고만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결과 원래 하나였던 재일동포사회도 남북으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남북이 갈라져도 그것을 막는 것이 재일동포의 도리인데 그러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남북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본국이 싸우면 일본에서는 안 싸우는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결국 남(南)과 일본 그리고 재일동포도 도리에 어긋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북(北)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재일동포도 재일동포 입장에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짐으로서 일본에서 ‘매몰’ 되지 않고 ‘소생’할 수 있고 남과 북도 민족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바르게 돌림으로서 바람직한 통일국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마다 역사관은 있겠지만 필자는 우리 한민족은 올바른 역사의 뿌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고 봅니다.
역사의 뿌리는 민족생명의 원천이요, 근원이요, 모체입니다. 역사에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있어야 됩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세계 고아가 됩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우리 역사가 어떻게 잘려 나갔는지. 최소한 이것만은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역사 전통을 만든 문화의 혼이 무엇이며, 문화의 본적지는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만이 한민족으로서 매몰되지 않고 소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매몰이냐 소생이냐” 밑에 부제목으로 ‘역사광복의 길’을 부쳤습니다.

 

3. 매몰이냐 소생이냐

이렇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일동포의 먼 훗날을 내다보면서 재일동포의 ‘매몰과 소생’ 문제에 접근하려고 했습니다만 준비부족으로 오늘 이에 합당한 글을 쓰지 못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일본의 귀화제도가 재일동포의 동화·매몰의 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일한국인의 65년 법적지위’의 원안을 작성한 자로 알려져 있는 이케가미 츠도무(池上努)의 ‘법적지위 200질문’(1965.11 日本京文社 발행)과 그리고 소생의 실례로 김경득(金敬得) 변호사(해방 후 한국적 변호사 등록 제1호)의 활동에 관한 소개로 대신하겠습니다.

매몰·이케가미 츠도무(池上 努)의 외국인정책
65년 법적지위는 한국 국적 취득이 전제조건입니다. 이 단계에서 원래 하나였던 재일동포가 한국국적 취득자와 취득하지 않은 자로 갈라집니다. 이제 재일동포는 부모가 갈라진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동화정책과 일본 사회의 끈질긴 민족 차별 때문에 재일동포는 온전한 인간의 삶을 잃고 항상 마음의 위안을 찾지 못하고 길 잃은 ‘미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이름으로 바꿔가면서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는 동포가 늘어납니다. 그런 분들은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포’로서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같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귀화허가률은 95%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국적 선택의 자유로 이행하면서도 끝끝내 귀화제도는 일본의 외국인정책, 민족대책의 근간으로서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5년 법적지위 타결에 반대했던 동포들(일부 한국민단과 조선총련계 동포) 즉 영주권 신청을 하지 않은 동포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케가미씨는 ‘삶아 먹든 구워 먹든 그것은 일본 정부의 자유이다’라고 전술한 ‘법적지위 200질문’에서 답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외국인정책·민족대책은 영주권 신청과는 상관없이 국적을 불문하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기본상 변함이 없습니다. 귀화허가률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때는 귀화허가률이 50% 가까이로 줄었고(1960년대 초) 때로는 95%이상까지(2000년대 이후) 늘어날 때도 있었습니다. 한·일 관계, 조·일 관계 세계 정세와 재일동포의 동향까지 살펴보고 일본의 미래까지 생각해서 귀화허가률을 조절합니다. 확실한 기준이 있어도 조절합니다. 즉 ‘삶아 먹든 구워 먹든’ 일본 사정에 맞춰서 정치조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일본의 국익이지요. 재일동포는 일본의 국익이라는 ‘틀’ 안에서 ‘삶아 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한다’라는 결론입니다. 이 ‘틀’은 어느 나라에도 대·소, 강·약은 별도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과 북이 재일동포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집(일본)에 살고 있는 자식(재일동포)들을 부모(남과 북)가 갈라져서 자식을 어떻게 키울지 의논조차도 못하고 있는 부모인데 재일동포로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부모에게 어떻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협의기구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정부에 매달려 붙을 수도 없지요. 그래서 나는 이를 두고 ‘미아’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바로 30년 전 1985년입니다. 재일동포 남녀노소, 한국민단·조선총련 사상을 불문하고 14,000명이 지문을 거부했습니다. “죄인만 찍는 지문을 왜 우리도 죄인같이 찍어야 되냐”라고 시작한 운동이었습니다. 14,000명이 거부한 것을 계기로 500명의 청년들이 지문을 거부한 채, 배를 타고 한국·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엔 상륙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지문을 거부한 채, 출국했으니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청년들은 한국에도 들어가고 일본에도 돌아올 결심을 하고 배를 탔습니다. 배는 결국 현해탄에서 헤매다가 어떻게 된 것인지(어디에서 지령이 내려왔는지 스스로 판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키나와를 경유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배가 부산까지 갔으면 한·일 양 정부는 이 배에 탄 청년 500명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나는 그때 지문철폐위원회 사무국장(위원장 김경득 변호사)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배는 현해탄 중간에서 멈췄습니다.
일본 각 지방을 대표해서 모인 동포 청년 500명이 배 안에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부산에 왜 안갑니까?
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
일본에 돌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합니까?
남으로 갑니까? 북으로 갑니까? 일본에 돌아갑니까?
이대로 침몰이야! 아니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삶아먹기도 구워 먹기도 쉬운 재일동포,
삶아먹을 수도 구워 먹을 수도 어려워진 재일동포,
본인들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재일동포,
매몰도 아니요, 소생도 아니요
‘이어’ 나가야 되는데…

배 안에서 한자리에 모인 청년 500명이 나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긴 설명을 생략하고 기조강연때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돌아온 김경득 변호사

김경득 변호사가 일본에 변호사 등록만 해놓고 한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온 것은 1985년 4월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귀여운 색시와 아이까지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27살까지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될까봐 이름도 숨기고 친구들한테 집도 안가르쳐주고 태어난 와카야마(和歌山)시에서 도망치듯이 동경에 나왔다고 고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동경에는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어서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일동포 학생들하고는 피해 다녔으며 이름도 가나지와(金澤)이라는 일본이름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3년 갔다 오더니 귀여운 한국 색시와 아이까지 데리고 왔으니 이제 감출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변호사 사무소를 차리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본명으로 변호사를 하게 되면 민족문제도 취급하게 되니 동포가 많은 오사카가 어떻습니까?”라고 권유했습니다만, 결국 동경에서 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무소 이름은 ‘우리 법률사무소’. 재일동포의 분단을 극복하는 뜻이 품어 있어 서로 뜻이 맞아 ‘우리법률사무소’가 그대로 지문철폐위원회 사무국으로 바뀌진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유로 ‘지문제도철폐위원회’ 회장 김경득, 사무국장 박병윤으로 시작한 지문거부는 벌써 1985년 5월 5,000명 가까운 거부자로 늘어났습니다. 김경득 변호사가 일본에 돌아와서 첫 변호 활동이 지문이었습니다. 14,000명의 법 위반자를 일본 사법은 어떻게 처분해야 될지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결국 면소로 재판은 이겼습니다.
어느날 김경득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호를 하는 과정에서 잠시 침묵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 변호사가 진술을 하다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진술하는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지문은 법률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이며 민족문제입니다. 나는 그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김 변호사의 몸에 ‘민족의 혼’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후 오사카 건국학교 40주년 기념행사 때, 그는 기념 강연을 하게 됩니다만, 그때 강연에 들어가기 전에 또다시 앞에 앉아 있는 재학생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울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 김 변호사가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학생, 학부모, 교원, 졸업생들을 보고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김 변호사가 이야기한 내용은 생략하고 기조강연때 소개하겠습니다.

 

4. 뿌리가 흔들리는 재일동포사회

지금 재일동포는 뿌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재일’이라는 용어 자체가 ‘헤매 다니다’가 결국 일본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겠다는 의사표시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100년 후에도 ‘재일동포’라는 용어가 계속 통하겠습니까.
한때는 ‘재남동포’, ‘재북동포’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 사는 동포를 ‘재남동포’ 북쪽에 사는 동포를 ‘재북동포’라고 인식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재일동포’가 의지할 자리가 어디인지요! 그래서 흔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재일한국·조선’으로 표기하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일본학자들이 재일동포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뜻으로 쓰고 있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의 생각이고 입장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지요.
조선 사람이면 조선 사람이지, 한국 사람이면 그대로 한국 사람이지요. 한국은 ‘남조선’이 아니지요. 조선도 ‘북한’이 아니지요. 상대방의 이름을 정식으로 불러야 대답을 해주지요. 다른 이름을 부르는데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과 북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남과 북, 그리고 재일동포를 보고 ‘한·조선인’을 쓰자고 제언하고 계속 사용하고 있는 학자까지 나타났습니다. ‘한·조선’은 어떤 민족이고 어떤 국적일까요. 이것은 완전히 생태계가 불투명한 인물입니다. 제창해서 23년이 지나도 한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이 없으니 결국 뿌리가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리 유명한 학자라도 일본에서는 매몰(동화)되고 국제사회에서는 국제 고아가 된다는 것이지요.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꾼 동포 중에는 계속 ‘조선’을 사용하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조선’은 남과 북을 합친 재일동포의 ‘총칭(總稱)’이라는 관점에서 수용한다는 것이지만 이해를 받기에는 상당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재일동포를 표기하는 용어를 ‘매몰과 소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일동포’ ‘한·조선’은 본인의 뜻과는 달리 매몰(동화)을 지향하며, ‘한국·조선’은 현상유지이며 ‘조선’은 소생지향, 즉 적극적인 민족지향이지만 미래지향, 통일지향으로 나가기에는 우여곡절이 많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나 역시 일본에서 쓰고 있는 ‘조선’이라는 용어에 관해서 필자 나름대로의 어리석은 견해를 밝히면서 ‘매몰과 소생’의 답으로 하겠습니다.

 

5. 맺는 말

재일동포사회에 있어서만 민족 지향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재일동포 ‘총칭’으로서의 ‘조선’을 ‘재일의 총칭’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한민족 상고사(환국→배달국→단군조선)부터 현재까지 9000년사에 기둥을 세우는 생각을 품고 수평으로 확산된 조선(내외 한인)과 수직으로 길어진 조선(9000년사)을 포용하는 ‘총칭’으로 바꾸는 것이 미래지향적이고 통일지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재일이라는 ‘점’에서 세계라는 ‘면’으로 훨훨 날아가는 한민족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해외동포와 남북동포가 정치적인 입지를 떠나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다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소생의 길이요 희망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재일동포가 그렇게 고집해오던 총칭으로서의 ‘조선’을 세로(從) 가로(橫) 입체로
꿈도 하나
희망도 하나
미래도 하나
재일동포도 하나

꿈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재일’에 자신을 가지고

재일의 화목을 발판으로
한반도를 전망하면서
온누리의 행복을 위한
홍익인간으로
소생해야 됩니다

이것은 재일동포가
재일을 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를 살고
미래로 가는
희망의 길입니다.

지금 국내에서 역사교과서가 검정이냐 국정이냐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 고비를 넘어야만 앞길이 보이고 북과도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지요. 성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올바르게 넘어야 마음 고비도 쉽게 넘어갈 수 있지요. 그동안 재일동포는 100년을 살아왔습니다. 백년을 일년으로 보면 지금 재일동포는 돌잔치를 맞이합니다. 이제 엄마 품을 떠나 혼자 걷기 시작했습니다. 돌잔치라는 ‘돌’은 되돌아온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민족으로 되돌아온 재일동포를 그동안 필자는 너무도 많이 봐왔습니다. 한민족으로서 100년이나 살아온 내가 자식을 남과 북이 함께 축하는 못할지언정 싸움을 시켜서는 안되지요. 김경득 변호사가 흘린 눈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역사를 바로 찾아 달라는 눈물이지요. 그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임시정부부터입니까? 장백산 줄기줄기부터입니까. 지금은 양쪽이 뭉쳐도 부족할 때입니다. 빼앗긴 들에는 아직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가 된 조국과 한민족으로서 소생한 해외동포가 만났을 때야만이 봄은 옵니다.

빼앗긴 역사는 언제 돌아옵니까. 나는 지금 나라현(奈良縣)에 살고 있습니다. 집 근처에 일본 초씨 신무천황(初氏 神武天皇)의 무덤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神武天皇 사망 2600주년입니다. 초씨 신무천황을 받드는 큰 행사를 합니다. 5월에는 사밋(サミッ)을 이세신궁(伊勢新宮) 옆에서 합니다. 이세신궁은 일본의 시조 아마데라스 오오미소가미를 받드는 곳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역사가 500년이 될까 말까입니다. 영국의 왕실이 길다 해도 일본 천황 2600년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작은 나라지만 미국보다 훨씬 오래된 나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 천황을 세계에 알리는 사밋도가 됩니다. 그러면 한반도는 어떻게 됩니까. 그 짧은 100년도 안되는 법통을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반만년의 찬란한 우리 역사 5000년의 우리 배달의 겨레”라고 어린들이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민족 5000년의 역사를 남북이 함께 바로 세움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한민족으로서 소생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이야기를 끝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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