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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 50주년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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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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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말모 / 재일동포 통일운동가

저는 이 심포지엄의 주최 측으로부터 ‘한일국교 50주년 재일동포 사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의 기조 강연을 요청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어가고 있고 더구나 저의 처지를 뒤돌아 볼 때, 역사학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분야의 전문가와 거리도 먼 처지에 주제 강연을 맡는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되어 주최 측의 양해를 얻어 몇 마디 격려사 말씀으로 대신 키로 하였습니다.

한·일 회담은 제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재학 중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동 대학 대학원 졸업시기에 타결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일본 조야에서 야기되었던 분위기라든가 또는 언론에서 주요 의제로 다뤘던 논점이 주가 되겠습니다만, 한·일 회담이 처음 개최된 1951년은 한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한참 전개된 시기였고 일본은 미국의 점령지 지배하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 측 입장에서는 한·일 회담의 중요성이나 긴박성이 별반 없었던 시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급변하게 된 동기는 미국의 세계전략 즉,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1961년 소·중·북의 3각동맹이 맺어지면서 동북아의 안보 상황이 심각했고 베트남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미국의 대응전략은 한·미·일 3각구도가 매우 긴요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일 회담이 시작되고 그동안 양국 간에 밀고 당기는 긴 회담이 조금도 진전될 기미가 엿보이지 않자 드디어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베트남전의 위기가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한·일 회담 시작에서부터 60년대 초 까지만 해도 한·일간의 현안들 청구권 등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물밑작업은 했으나 적극적인 개입의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매우 세심하게 대처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애매한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한 계기가 캐네디 대통령 시절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캐네디 미대통령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을 미국 외교의 기본방침으로 천명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캐네디 정부의 속사정은 대외원조를 놓고 의회와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었습니다.

실례로 1961년 미 회계연도를 보면 대외 원조가 32억 5천만달러로 책정되었는데 (요구액 41억 5천만달러), 이스라엘에 지원된 (총액의 30%) 예산을 빼고 나면 기타 국가에 지원될 예산은 크게 삭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의 입장은 어떠했을까요.
일본이 한·일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은 한·일 회담이 종극에 가서는 배상금을 내놓아야 할 텐데 당시 일본의 재정형편은 그러한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속사정은 일본 정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다고 하는 인식의 공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불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상대(한국)와 근본적인 인식차이가 있기 때문에 ‘청구권’이란 합의장에 나가는 것을 매우 꺼렸던 것입니다.

이때 나온 것이 저 유명한 구보다(久保田)발언 입이다.
당시 구보다 발언은 그 자의 개인 의견이라기보다는 일본 정계의 지도자들이 공사석에서 흔히 내뱉은 발언이었습니다.
구보다가 이때 내뱉은 발언 중에는 ‘36년 동안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은 한국 국민에게 유익했다는’는 말로 요약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보다발언은 한·일 교섭을 지연 시키려는 저들의 전술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또한 전후 일본을 지배했던 기시(岸), 이케다(池田), 사또(佐藤)등 한·일 회담 전후의 일본 수상들의 원숙한 대미외교와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지배체제는 미국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1960년 6월 일본에서는 안보투쟁이 전개 됩니다. 이 안보투쟁은 전후 일본이 미국을 향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일종의 항미(抗美)운동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미국의 대일 압박은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경제가 호황을 맞고 있었습니다.
1956년 일본의 경제백서는 ‘일본은 이미 전후가 아니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호전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케다 수상체제는 ‘미국에 할 말 다한다’는 자세로 한일회담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는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국에 계신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일본에서 엿듣고 본 제 입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한전쟁 휴전 후 이승만 지배체제의 한국은 ‘미래가 안 보인다’는 인식이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는 것이 유일한 대외원조인데 한국은 1948년부터 62년 까지 미국으로부터 세계 4위인 약 54억불을 받았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평가였으며 북한의 경제개발에 한참 뒤진 상태였습니다.

또한 이시기에 (1956년)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북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건설의 ‘망치’ 소리요. 남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가난의 상징인 ‘보릿고개’란 소리가 들려와 10만 명에 달하는 재일동포가 북송선을 타게 된 것입니다.

또한 60년 4·19학생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4·19는 이승만 박사의 퇴진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미국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미국은 이승만을 버리지 않았던가 회상됩니다.

이승만 퇴진 후 장면 정권이 수립됩니다만 장면 정권 역시 혼란의 극치가 아니었던가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장면 정권도 단명으로 끝나고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5·16직후 장면 총리는 반도호텔 숙소에서 하필 수녀원으로 도피합니다.
이승만 박사나 장면 박사는 한국 사회에서는 친미파 인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한 친미파 인사를 미국이 보호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게 됐을까요. 당시 일본 언론에는 이러한 의문점을 제시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점중 하나가 당시 미국의 세계 전략의 핵심이었던 한국과 일본을 묶어 공산주의 세력의 봉쇄 전략에 이승만도 장면도 믿음직한 버팀목의 역할을 수행할 인물로는 평가절하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탄생한 5·16 지도자 박정희 장군의 제일의 급선무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으로부터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캐네디 미대통령은 죽기 전 마지막 회견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선언 합니다.
이는 한국의 반(反) 5·16세력들에게는 미국은 절대 군사정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박정희 장군의 방미(訪美)가 거침없이 추진됩니다. 당시 캐네디는 세계 자유인들로 부터 젊음, 이상, 정의감, 프론티어 정신을 토대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것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이 극적으로 증명되기도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미국을 너무나 몰랐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캐네디 사망 후 존슨 대통령이 들어서자 박정희 장군은 미국을 방문하여 존슨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선언합니다.
박·존슨 회담 후 미국은 그동안 수면 아래서 은밀히 추진하던 한·일 회담을 전면에 나서서 강력히 추진하게 됩니다.

존슨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최고의 관심사의 하나로 ‘한·일회담’을 꼽았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안보논리였습니다.
1963년 박·존슨 회담에서 존슨은 ‘한·일국교정상화가 극동안정에 공헌할 것으로 믿는다’란 언급을 신호로 하여 본격적으로 한·일회담 전면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급은 일본 수상 이케다가 방미할 때도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한국 지원이 한국의 강력한 발전에 매우 유용하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미·일간의 공식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이쯤해서 몇 가지 가상을 해봅니다.
베트남전이 위기로 몰아가지 않았다면 미국이 저토록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을 지원했을까요.
박정희 정권의 적극적인 베트남전의 참전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면 한·일회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국이 한국편을 들어줄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아무튼 한·일회담은 14년이란 긴 시간을 끌면서 1965년에 타결되었습니다만 한·일 양국민 사이에는 오늘도 65년 체제에 대해 불만을 쏟아냅니다.

유무상 5억불이 36년 일제통치에 대한 배상치고는 ‘말도 안 되는 액수다’라는 소리도 들립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7천만불대 7억불의 기(氣)싸움에서 유무상 6억불의 타결은 베트남전이 한국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준 선물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면 재일동포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재일동포들은 한·일 정상화가 조국의 경제발전에 초석이 될 수 있다면, 재일동포의 법적지위가 다소 미흡하더라도 지원하고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 타결 이후, 조국의 경제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 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습니다만, 재일동포들의 교육여건, 민족정체성 함양을 위한 본국 정부의 지원은 매우 미미했습니다. 오늘날 재일동포 사회의 공동화(空洞化)는 본국 정부의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무지와 무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재일동포들의 자녀들은 모국을 배우자는 일념으로 ‘모국 유학’이란 꿈을 안고 서울에 왔습니다. 이들은 조국을 사랑한다는 일념만으로 왔지만 이들 역시 조국에 대해 너무도 몰랐습니다. 이들은 이 무지로 인해 국가보안법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국이여 동포들이여 두번 다시 ‘일제’라는 수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국의 통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의 숙원이 아닐까요.
나는 오늘도 이은상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신 통일선언문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무슨 일을 했고, 또 무슨 일들을 과연 했으며, 나는 북쪽을 바라보다가 말고, 뒤돌아서서, 남쪽동포들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대 과연 통일을 원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코 대답해 보라. 통일을 원하는가. 그 지위보다, 그 권력보다, 과연 통일을 원하는가.”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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