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 / 수석논설위원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손양원 목사는 하늘처럼 넓은 가슴을 지닌 분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 용서’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닌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은 여순반란사건 당시 공산 프락치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손 목사는 아들의 장례식 날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손 목사의 외침은 빈말이 아니었다. 여순반란이 진압된 뒤 두 아들을 죽인 사람 중 한 명인 안재선씨가 체포됐다. 이번에는 그가 총살당할 처지에 놓였다. 목사는 계엄사령관을 찾아가 안씨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호소로 안씨는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손 목사는 두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다. 이름을 안재선에서 손재선으로 바꾸고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성서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손 목사는 성서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분이 아닐까 싶다. 히브리어에서 ‘용서하다’는 말의 ‘슈브(shuv)’는 ‘되돌리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전의 잘못된 악행을 선이 있는 곳으로 되돌리는 것이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가해자도 마땅히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지옥에 빠진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

지난 일요일 백발의 노인이 56년 만에 용서를 구했다. 올해 일흔일곱 살인 김덕모씨는 경남 창원의 국립3·15민주묘지의 김주열 열사 묘소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미안하오. 용서해 주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김 열사는 마산상고 1학년 때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인물이다. 철사로 묶인 그의 시신은 한 달쯤 뒤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김씨는 당시 시신을 버릴 때 지프차를 몰았던 운전기사였다.

중증치매를 앓고 있는 김씨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이승의 죄를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직접 사죄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반세기 이상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씨와는 달리 아직 용서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역사적 사건의 학살 책임자나 사적 영역의 가해자들이 숱하다. 이제 그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 용서를 구할 차례다. 그것만이 지옥 같은 마음을 천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