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희 / 논설위원

새삼 깨달았다. 한국인은 절망에 빠져 있을 틈이 없다는 걸 말이다. 암울한 정국에 좌절과 절망이 스며들 즈음이면 ‘우린 아직 살아 있다’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영웅이 반드시 나타났다. 이세돌 9단도 그런 영웅으로 꼽을 만하다.

그가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경기에서 연속 3패 후 첫승을 거두는 장면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골프선수 박세리가 US오픈에서 보여줬던 ‘맨발 투혼’과 겹쳐졌다.

박세리가 물가로 떨어진 공을 살리기 위해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그의 까만 종아리와 대비되는 하얀 발을 보았다. 그의 노고가 한꺼번에 읽혔다. 그리고 한국인에겐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US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는 그 어렵던 시절에 끈기와 노력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세돌의 교훈은 이보다 스케일이 크고 현실적이다. 승패를 떠나 그가 경기에서 보여준 태도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패배주의적 관념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것이었다.

“실력 부족으로 진 것이다.”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세돌이 3연속 불계패한 뒤 일각에선 사람 한 명과 컴퓨터 1202대 간의 불공정 대결이라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불평하지 않았고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게임을 ‘인간 vs 기계’라는 식으로 과장하지도 않았다. 불공정하다는 불평은 전형적인 ‘남 탓하기’였다. 사람의 뇌가 수억 개의 뉴런으로 연결돼 있듯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게 AI의 본질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엔 ‘남 탓하기’ 문화가 만연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이 앞장섰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안 되면 국회 탓을 했다.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김무성을 죽이라”고 했던 막말파동 후 이 사건의 본질은 자신의 막말이 아니라 ‘누군가의 녹음’이라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외쳤다.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부끄러운데 그는 자기 탓이 아니라며 버텼다. 이 같은 남 탓 문화는 어느덧 전 방위로 확산 중이고, 우리 사회의 걱정스러운 패배주의의 한 단면이 됐다. 바둑에서 진 걸 기계 탓으로 돌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세돌은 ‘남 탓’ 하지 않는 멋진 태도를 몸소 보여줬다.

“알파고는 두 가지 약점을 노출했다.” “알파고는 흑을 더 힘들어 한다. 다음엔 내가 흑을 잡겠다.” 이세돌은 세 번의 대국 만에 알파고의 약점을 간파했다. 그리고 남은 경기에선 자신이 더 불리한 상황에서 경기를 했다. 마지막 대국에선 비록 졌지만 인간의 창의성이 기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점, 기계에는 없는 인간의 배포를 보여주며 그는 이 경기가 시작된 후 ‘인간계’에 널리 확산됐던 AI에 대한 공포를 걷어냈다.

그가 거둔 단 1승이 빛나는 건 그래서다. 그의 승리는 한국 산업사에 중요한 모멘텀이 될 거다. 이미 세계는 AI가 중심이 되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다. 90년대부터 시작된 IT혁명은 정보 유통에 중점을 둔 정보혁명이었다. AI 혁명은 정보처리와 함께 인간의 직관력과 의사결정 능력까지 학습한 인공지능이 의사결정까지 하는 ‘인간과 기계가 공생하는 사회’를 열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이 누렸던 직업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는 그야말로 인간계의 혁명이 일어날 거다.

그의 1승은 우리가 AI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산업을 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AI 기술은 선진국 대비 2.6년 늦었다. 큰 격차다. 그러나 한국인이 누군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따라잡고 압도하는 실력 있는 민족이다. 지금처럼 정치도 경제도 죽을 쑤는 이 암울한 시기에 이세돌의 AI 도전은 어쩌면 우리가 AI 경제를 선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위기마다 나타나는 멋진 한국인들이 있어 우리나라는 정말 살아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