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동 / TV조선 편집1부장

영화는 끝났지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심리 치료 중에 그렸다는 그림이 한 점씩 바뀌며 나오고, 국민 후원자 7만5000여명의 이름이 가나다 순으로 펼쳐지는 동안 옆 사람도, 앞·뒷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화제인 '귀향' 얘기다.

비슷한 시기 TV조선은 개국 5주년 특별 기획 3부작 '일본군위안부'를 방송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이고, 하나는 다큐멘터리이지만 역사의 무게도,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다르지 않았다. 다큐에서 한국·중국·필리핀 등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쏟아낸 증언을 '귀향'에 영상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귀향'이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공통분모였기 때문일 게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전과 이후는 달랐다. 1년여간 '일본군위안부' 다큐를 준비하며 느낀 온도 차도 확연했다. 2년여 전 프랑스 앙굴렘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위안부 특별 기획전을 주도한 건 우리 정부였다. 당시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은 프랑스로 날아가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위안부 피해 참상을 알려 국제 이슈로 부각시켰다. 일본 측이 방해 공작을 서슴지 않던 상황이라 조 장관의 '위안부 알리기'는 돋보였다.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발 벗고 나섰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희정 장관 때도 그 기조는 이어졌다. 위안부 다큐 기획·제작 과정에 도움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합의' 이후 정부는 '원칙론'에서 물러섰고, 위안부 관련 사업들도 지지부진이다. 외교라는 게 막후에서 더 많은 일이 이뤄지다 보니 '합의' 과정의 숨은 배경을 낱낱이 알 수는 없다. 다만 한·미·일 공조 강화를 원하는 미국의 압력에 등 떼밀렸을 것이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더 복잡하게 꼬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일본은 '불가역적 합의'라고 확성기를 틀고, 유엔에서도 "강제 동원 증거가 없다"는 망언을 계속한다. '불가역적'이라는 틀에 우리를 묶어두고 멋대로 행동한다.

위안부 다큐 방송을 코앞에 둔 시점에 2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숨을 거뒀다. 이제 생존 할머니는 44명. 일본은 '시간은 내 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을 기다리고, 소녀상 철거에 공을 들일수록 소녀상과 기림비는 늘어나고 있다. 3·1절에 부산에선 또 하나의 소녀상이 추가됐다. 역사적 사실은 되돌릴 수도, 바꿀 수도 없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과거를 넘어 미래를 열려면 일본이 '불가역적 합의' 운운하기보다 '불가역적 진실'부터 마주해야 한다. 다큐에서 "정신이 박혀 있는 한 잊을 수가 없다"는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그 한 맺힌 기억이야말로 '불가역적'이다.

TV조선 다큐는 일본이 '군 위안소'를 '요리점'으로 표기한 공문서도 공개했다. 당시에도 '반(反)인륜 범죄'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숨겼다는 뜻이다. '불가역적 합의'라고 애써 강조하는 것 자체가 불가역적 해결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