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옥 / 논설위원

중견기업 전무로 근무 중인 양 모씨(53)는 요즘 아들 생각만 하면 우울해진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영어유치원이며 온갖 학원에 치이더니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밤 10시 전에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중3 수학까지는 마쳐야 하고 과학고라도 가려면 중2 전에 고3 수학까지는 끝내놔야 한다는 아내의 푸념이 결심을 재촉했다. 때마침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와 엄마 간에 전쟁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엄마가 앓아눕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길로 아이를 호주로 유학 보냈다. 고등학교부터는 미국 보딩스쿨에 보내느라 수억 원이 깨졌다. 퇴직금을 주식으로 굴려 가욋돈을 만들었기 망정이지 월급쟁이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애면글면 뒷바라지한 아들은 미국에서 꽤 괜찮은 주립대를 나왔지만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면 현지 취업이 아예 불가능했다. 어영부영 군대에 다녀와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그래도 지옥 같은 한국 교육을 안 겪고 건강하게 잘 자랐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조그만 증권사라도 취직 자리를 알아봐야 할 텐데` 하는 걱정에 마음이 급하다. 요즘 아이들 취업은 아버지 몫이라고 하더니 내가 딱 그 짝이구나 싶어 쓴웃음만 나온다.

최근 10년 새 `해외 유학=고급 일자리`라는 등식이 깨지면서 유학 열풍이 시들하다. 특히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들이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조기 유학생들을 기피하면서 2006년 2만9611명에 달했던 조기 유학생은 2014년 1만907명으로 3분의 1 토막이 됐다. 다양성·유연성·혁신성 제로(0)의 한국 기업 문화가 근본적인 문제지만 뼈 빠지게 유학까지 시켰는데 한국 기업조차 못 들어간다니 부모로선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흙수저 출신이 어찌어찌 중산층 언저리까지 왔다고 해서 내 자식을 금수저로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렸던 게 아니다. 갈수록 흉포해지는 한국의 교육 현실 속에서 자칫 흙수저마저 형체 없이 뭉개질까 두려워 노후를 담보 잡아 탈출시켰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지난한 고생길의 끝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더 암담했다. 2015년 미국 내 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인은 학부생 3만3651명 등 총 6만3710명, 조기 유학생까지 합치면 8만7384명이고 이들이 연간 미국에 갖다 바치는 돈이 23억달러(약 2조8000억원)에 달한다. 반면 전문직 취업비자(H-1B)와 주재원 비자(L-1) 등으로 미국에 취업한 한국인은 2012년 기준 총 6만7000명이다. 미국이 한 해 H-1B 쿼터를 8만5000개씩 풀지만 신청자는 무려 23만명. H-1B 쿼터 중 한국인 몫은 평균 4500개에 불과하다. H-1B 비자는 6년 단위로 갱신해야 하고 가족들의 취업도 제한된다. 더구나 건당 4000달러에 달하는 비자 신청 비용이 고용주 몫이다.

그러니 학교 성적 최상위권, SAT(미국 대학진학시험) 2250점 이상, 각종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섭렵이라는 `신의 스펙`을 갖고 아이비리그를 나와도 미국 본토 취직 문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기 일쑤다. 미국 경기가 살아나면서 실리콘밸리 구인난이 심해지고 있다는데도 로또나 다름없는 취업비자 때문에 한국 청년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오면 백수 혹은 군 입대라는 잔혹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정부의 잔여 시한은 이제 2년이다. 미국이 대선 정국으로 치닫는 지금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 약속했던 연간 전문직 비자(E-4) 1만5000개를 따낼 마지막 기회다. E-4비자는 고용이 유지되는 한 무제한 체류가 가능하고 가족의 취업도 자유롭다. 고용주 부담도 없다. H-1B보다 조건이 훨씬 좋다. 미 국무부 주도로 2013년 한국 국적 전문직에게 연간 E-4비자 1만5000개를 발급하는 내용의 법률안(Partner with Korea Act)을 상하원에 제출했지만 회기 내 법안 통과가 되지 않아 폐기됐다. 지난해 다시 같은 법률안이 상정됐지만 1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한·미 FTA 발효 4년이 다 되도록 하원 80명, 상원 6명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그치고 있으니 답답하다.

대통령이 우선순위에 놓고 챙기면 안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게 우리 공무원 사회 분위기다. 대통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년 일자리를 가로막는 국회의 직무유기를 질타하면서도 미국 심장부에 양질의 청년 일자리 1만5000개를 매년 만들 수 있는 사안에는 무관심한 듯 보여 안타깝다.

최근 북핵 문제로 한·미 간 대화가 잦고 긴밀하다. 이참에 북핵과 더불어 대통령이 미국 전문직 일자리 1만5000개라는 실리도 확실하게 챙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