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 문화부장

1968년 노벨 문학상 시상식장.

백발의 왜소한 동양인이 서양인들 사이에 섰다. 도를 닦은 듯한 형형한 눈빛과 단아한 자세. 체구는 작았지만 그는 주변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였다.

"내 삶의 기념으로서/무엇을 남길 건가/봄에 피는 꽃/산에 우는 뻐꾸기/가을은 단풍 잎새."

승려 시인 료칸의 시를 인용하면서 읽어 내려간 수상 소감에 서양인들은 넋이 나갔다. 뭔가 환희와 기쁨에 가득 찬 수상 소감을 예상한 서양인들에게 야스나리의 소감은 `동양의 미학` 그 자체였다. 야스나리는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일본 시인의 시를 읊으며 그렇게 서양을 매료시켰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것을 무작정 흉내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고 다듬어 교묘하고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

최근 야스나리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된 에치코 유자와(越後湯澤)에 다녀왔다. 적설량 1m가 넘는 날이 종종 있는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니가타(新潟)현 에치코 유자와는 인구 8000명의 작은 온천 마을이다. 소설 `설국`은 곰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드나들던 작은 마을을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주말이면 마을 인구의 몇 배가 넘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덕분에 근처 스키장들도 성업 중이다. 니가타의 명물인 전통 사케는 이 마을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필자는 그곳에서 `눈(雪)`에 한 번 놀라고, 일본인들의 치밀한 보존 본능에 또 한 번 놀랐다.

지나간 과거는 뭐든지 갈아엎고 보는 한국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보존 본능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야스나리가 `설국`의 초고를 집필한 다카한(高半) 여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일부 증개축은 했지만 야스나리가 머물렀던 방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야스나리가 썼던 앉은뱅이 책상과 필기구, 심지어 글을 쓰다 버린 파지까지 남아 있었다.

야스나리가 다카한 여관에 머문 시기는 1934년 무렵이었다. 무려 80여 년 전 단 한 달을 머물다 간 작가의 흔적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걸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사실 일본의 보존 본능은 일본의 자산이기도 하다. 다른 사례를 보자.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전통 씨름이 존재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토리텔링에서 큰 차이가 난다.

우리 씨름은 샅바를 잡고 상대를 넘어뜨리면 승리하는 승부 방식 말고는 대부분 현대화된 구성으로 진행된다. 씨름 팬츠에 `○○○식당` `○○페인트`라는 스폰서 이름이 우악스럽게 인쇄된 걸 보면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일본의 스모는 다르다. 선수들의 머리 모양과 복장, 입장하는 방식, 심판의 행동, 상금을 받는 자세 등 모든 것이 수백 년 전 그대로 진행된다. 스모를 둘러싼 모든 규정과 행위에는 신화와 전통에 기반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긴 선수가 다음에 싸울 자기 편 장사에게 물을 떠주고, 상금을 받을 때 손을 좌우로 흔들고, 경기장에 올라가서 양쪽 다리를 번갈아 들어 올리는 등 모든 행위에는 신화와 스토리가 담겨 있다. 스폰서 노출도 경기 중간 고풍스러운 깃발에 상호를 써서 숙연하게 한 바퀴 도는 전통 방식을 따르고 있다. 스모 경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전통 공연이자 문화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은 일본에 오면 한 번쯤 스모 경기를 본다. 스모 관람이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흥미로운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전통 씨름을 보러가는 외국인은 드물다.

에치코 유자와를 떠나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필자는 말로 하기 힘든 비애를 느꼈다. 거의 모든 문명을 일본에 전해준 게 바로 우리였는데, 막상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어설픈 키치(Kitsch)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왜 저들은 자기들의 모든 과거를 자산으로 만드는데, 왜 우리는 모든 과거를 갈아엎고 묻어버리려고만 할까. 혹시 우리는 지나온 날들을 저주하는 중병에 걸려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