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재 / 논설위원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한반도 주변 안보 지형은 어떻게 변했고, 관련국들은 어떤 셈법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까. 우선, 이번 핵 실험이 초래한 가장 큰 파장은 한반도 정세가 '한ㆍ미ㆍ일 대(對) 북ㆍ중'의 대결구도 비슷하게 자리매김하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북한과 껄끄러웠던 중국은 핵 실험 자체는 비난하면서도 한ㆍ미ㆍ일 군사동맹 강화 움직임에 대해 '자제'를 촉구하며 은근히 북한 편을 들고 나섰다. 과거 '혈맹' 수준의 동맹 복원까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전통적 입장을 재확인한 것 자체만으로도 김정은은 나름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할 것이다. '수소탄 시험'이 정말인지 아닌지를 떠나 그들의 핵 능력이 한층 향상됐다는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도 북한이 의도했던 일일 것이다. '공훈기자' 칭호를 쓰는 노동신문 동태관 논설위원이 "악의에 찬 중상과 으르렁대는 제재소동, 매일 같은 의사표명, 분주스러운 쑥덕공론으로 또다시 세계는 소란하다"며 "그러나 새로운 강국의 출현은 언제나 진동을 동반하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를 방증한다.

물론, 남북 관계의 악화와 국제적 고립 강화는 김정은 정권에 부담이 될 것이다. 당분간 남한 내에서는 대북 협상파의 목소리를 찾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매파' 들의 개성공단 철수 요구가 현실화될 경우 김정은 정권은 '돈 가뭄'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남조선은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한다. 또 박근혜 정부와의 대화는 포기하겠다는 자세로 핵 실험을 강행한 것이라면 '확성기 방송' 재개 등 남북 관계 악화는 그들의 사전 계산 속에 당연히 들어 있었을 것이다. 남북 관계는 북미 관계의 종속 변수라는 판단하에 오직 미국만 상대하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향후 제재 수위와 중국의 태도, 우리 측의 대응 여부 등이 변수가 되겠지만, 북한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핵 실험을 통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을 속으로 가장 기뻐했을 이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닐까 싶다. 지난해 9월 집단자위권 행사를 뼈대로 한 안보법안 강행처리 이후 야당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로 어려움을 겪던 아베 정권에게 북 핵실험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을 것이다. 북핵 위협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안보 이슈화의 구실을 제공했고, 선거에 승리하게 되면 그가 목표로 하는 연내 평화헌법 개정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위안부 협상 타결을 통해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고 판단하는 아베 정권으로서는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한일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군비 증강의 길로 나아갈 명분을 확보하게 됐다. 중국의 해양 팽창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우경화와 군사 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는 아베 정권에게 북핵은 1등 공신인 셈이다.

중국은 난처할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방한, 박근혜 대통령의 톈안먼 광장 전승절 행사 참석 등으로 공들여왔던 한국과의 관계가 기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사 갈등으로 한ㆍ중 대 일본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한ㆍ미ㆍ일 결속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겠다는 구상도 어그러졌다. 골치 아픈 김정은 정권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도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동북아에서의 '큰 판'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이 어느 쪽에 설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북한을 마냥 외톨이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를 긴장국면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적절한 등거리 외교로 북핵 문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한반도 현상 유지 전략을 추구하려 들 것이다.

미국은 4차 핵실험 이후 '전략적 인내'를 '의도적 무시'로 바꾼 듯 보인다. 북한 핵실험이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이상 당장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은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 것이라는 게 미국 측의 설명이지만, 인내 든 무시 든 기본적으로 북핵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관심은 오로지 중국의 굴기를 어떻게 저지할 것이냐에 쏠려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북한의 핵실험은 그동안 차질을 빚었던 한ㆍ미ㆍ일 안보 동맹을 탄탄히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미국 입장에선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수소탄이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본토를 위협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지만, 그건 당장의 위협은 아니다. 임기가 1년 남은 오바마 대통령은 굳이 자신의 '레거시 목록'에 북한을 포함해야 할 절박성을 느끼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란과 쿠바가 목록 상단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먼저 중국의 뜨악한 태도로 인해 대중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 '중국 경사'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톈안먼 망루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때 중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 중국은 외면하고 있다. 일본과의 과거사ㆍ영토 문제는 언제든 표면화될 수 있는 악재이고 우경화 야욕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지만,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본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철석같은 한미 동맹을 재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까. 하지만 그건 어차피 상수였을 뿐이다. 균형외교니, 남북 간 신뢰 프로세스니 하는 것도 당분간 빛바랜 구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남북 간 긴장 고조가 가져올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은 아무래도 경제 규모가 큰 우리가 북한보다 불리하다.

여기까지가 답답한 현실이고 예측 가능한 미래다. 흔히 현실을 직시해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 기조에서 '한ㆍ미ㆍ일 동맹을 강화해 북의 도발에 대비하고,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을 철저히 고립시켜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우리측 북핵 대응의 핵심이다. 이런 현실적 원칙론을 말하기는 쉽다. 조건 반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누구한테 크게 욕먹을 일도 없다. 하지만 이런 고식적이고 뻔한 대응이 과연 최선일까. 도발 대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할 국제 공조와 고립은 중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는데도 계속 중국을 압박한다고 해서 어떤 효과를 볼 수 있을까. 더구나 이 모든 것이 북한이 뻔히 예상했던 시나리오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그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대응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북이 예상치 못한 대응, 허를 찌르는 한 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타파하는 외교 전략은 과연 없는 것일까. "무슨 묘수가 있겠나. 원칙대로 가는 거지"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