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흡 /조선비즈 위비연구소장

일본에서 'ALWAYS 3번가의 석양'이란 영화가 크게 히트한 것은 10여년 전인 2005년이었다.

1958년의 도쿄 변두리 동네가 배경이다. 똑같이 재현해 놓은 그 시절의 거리, 스크린에 비치는 추억의 상품과 사건들, 희망을 갖고 살아가던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일본은 향수에 젖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후반까지의 상품들이 다시 히트하고, 당시 가요를 전문으로 트는 카페가 수두룩하게 생겼다. 당시의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도 등장했다. 이른바 '레트로(retrospective·복고) 붐'이다. '힘들었지만 꿈이 있던 시절'을 그리는 이 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시작돼 이 영화로 정점을 찍고 그 후로 4~5년을 더 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유행 중인 한국과 겹쳐 보이지 않는가?

인구 구조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재주를 부린다. 비슷한 인구 구조를 가진 사회에선 시차를 두고 비슷한 경제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1947~1949년생)는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보다 10~15년 정도 먼저 태어났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10여년 전 신문 기사들은 현재 한국 신문 기사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 문제, 파견 근로자와 비정규직 문제, 연금 개혁과 재정 건전성 문제, 청년 실업 문제 등 최근 국내 경제의 큰 화두들이 당시 일본 언론에도 똑같이 등장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거대한 노동력 층이기도 하고 큰 소비자층이기도 하다. 경제활동 연령이 되기 이전에는 유·청소년 대상 산업을 자극하고, 직업 전선에 들어서면 나라의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며 고도성장의 주역이 된다. 반면 피크를 지나면 노령화의 주역이다. 기업들의 부담이 되면서 청년 실업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베이비붐 세대가 50세 언저리에 이르면 경제활동 인구가 점차 줄면서 저성장 시대가 온다. 사회가 침체되면 베이비붐 세대는 활력 있던 젊은 날의 고도성장기를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때 이 분위기를 타고 '레트로 비즈니스'가 성립하게 된다.

문제는 레트로 붐이 한창이던 2000년대 10년간은 1990년대에 이은 일본의 또 다른 '잃어버린 10년'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추억과 소통하고 탐닉하는 사이에 소비자로서의 국민의 취향은 외딴 섬 '갈라파고스'처럼 세계와 유리됐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젊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30대일 때 전 세계 젊은이의 아이콘 '워크맨'을 만든 나라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마음에 걸린다. 추억 회상은 이 정도만 했으면 한다. 푸근한 드라마 하나 히트 치는 게 뭐 그리 불만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은 과거의 추억보단 새로운 것에 설레고, 빨리 써보고 빨리 적용하는 '얼리 어답터'로서의 능력이 탁월한 전 세계의 '테스트 베드(실험 시장)'다. 일본만큼의 내수 시장도 없는 우리가 소통해야 할 대상은 안보다는 밖이고, 응답하라고 할 시간은 과거보단 미래여야 하지 않을까.

사실은 당시 일본에서도 이 글과 비슷한 글이 종종 등장했다. 레트로 붐이 끝나는 시기가 일본 경제가 활력을 찾는 시기이며, 꿈이 있던 시대를 그리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꿈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글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