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주ㅣ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역사학

한국과 일본이 일제의 강제 위안부 문제를 협상으로 풀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외교력이 돋보인다. 일본의 협상 전략을 네 개의 'S'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가 'Sorry' 즉 사죄이다. "군이 관여한" 문제라며 군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를 결부시켜 일본 정부 자체를 행악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을 비켜갔지만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또 "총리대신이 깊은 사죄를 표명한다"고 명시했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위해 일본 정부가 10억엔 정도의 예산을 책정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줘야 할 것을 안 주고 버티다 이제야 '사업'이라는 간접 채널을 통해 내놓으면서 생색을 낸 모양새지만 'Sorry'를 받아낸 것은 인정한다.

일본은 'Sorry'의 반대급부로 두 번째 S인 'Stop'을 요구했다. 이번 협상에서 일본이 '올인' 한 조건이다. 더 이상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야무지게 받아냈다. 위안부 문제는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못 박았다.

이제 앞으로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재론하려면 일본 정부가 합의 사항을 위반했다는 증거를 대야 한다. 이를 국제 여론에 호소해야 하는데,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명백한 위반 사례가 아닌 경우 국제 여론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특히 계약 사회이며 증거 제일주의 전통을 가진 서방에게는 약자의 끊임없는 투정으로 비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세 번째 S를 요구했다. 가볍게 표현해서 'Shut Up'이다. 더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리치지 말라는 입막음이다. 애초 한국 정부는 이 요구가 논외라고 주장했지만, 허언(虛言)이었다. "일본정부가 한국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을 우려하는 점을 인지하고 관련 단체와의 협의하에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해 주었다.

일본 정부가 이렇듯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네 번째 S이다. 미국의 'Support(지원)'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일본의 재부상을 인정한 터다.

앞으로도 계속될 중국의 막무가내 부상을 의식한 결과이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까지 변화한 일본을 받아들인 미국에 대해 아베 정부는 효율성이 뛰어난 반대급부를 던졌다.

이제 미.일 관계에 심각한 불편요소는 남아있지 않다. 달콤한 밀월을 보내고 돌아와 이제는 한번 보란 듯이 억세게 살자며 둘이 팔을 걷어붙이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한국 정부가 서둘러 합의에 응한 이유에는 위안부 문제를 다음 해로 넘기지 않고,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2015년 안에 매듭지으려는 의도가 포함되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박근혜 부녀가 일본과의 불행한 역사의 매듭을 풀었다는 상징성을 확보하려 한 듯하다. 이제 한국 정부는 '신년 패러독스(New Year Paradox)'에 신경을 써야 한다. 새해를 맞아 심기일전해서 모양새 있게 선언한 맹세가 더 쉽게 깨지는 역설이다. 큰소리로 외친 약속은 조용히 마음 속으로 다짐한 약조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패러독스의 가능성을 줄이려면 역사적 성과 또는 상징성을 운운하는 대신, 그 어떤 정부간 합의문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이 민족의 아픔과 수모가 잊히지 않도록 차분하고 심도 있게 그 역사성을 정립하고 기리는 일이다. 이제 위안부 문제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