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협 / 정치부 차장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에 던진 경고가 귓전을 맴돈다. 특히 요즘 같은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취임 직후인 1993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현안으로 부상하자 “할머니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겠다, 우리가 직접 하겠다”고 밝힌 고인의 심경도 십분 이해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1·2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의 조기 타결에 합의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진전 기미는 없다. 오히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베 총리 세력은 돌아가며 망언을 일삼고 있다. 회담 이전보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기류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 문제는 끝났다, 이 같은 왜곡은 기본이다.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발언도 되풀이됐다. 아베 총리부터 나서 정상 간 대화의 비공개성을 악용해 언론 플레이를 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평화의 비)을 철거하라든가, 이번에 해결되면 추가 요구는 더 이상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약속하라는 점만 부각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최측근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장관은 24일 한 언론에 “기본적으로 해결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인도적 후속 사업을 계속해 왔다”고 했다. 뻔뻔함의 극치다.

한 달 새 벌어진 망발 시리즈는 아베 총리가 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가 22일 도쿄(東京) 재일본 한국YMCA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말했듯 소녀상은 정부나 정대협이 철거할 수 있는 시설물이 아니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자체로 역사가 됐다. 설마 하면서도 아베 총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이제 47명의 할머니만 세상에 안 계신다면…’이라는 반인륜적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고작 47분이다. 국내 43분, 중국 등에 4분이 계신다. 전국 두 곳 시설, 나눔의 집, 친지 집 등에서 여성가족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생활안정지원금을 조금 받고 있다. 17분의 할머니는 워낙 고령이라 서서히 기억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전언이다.

그런데도 일본 우익이 미국 학자들에게 위안부 문제가 조작됐다는 내용의 책자를 배포하면서 뒷골목 외교전을 펴는 모습은 측은할 정도다. 한국이 골대를 자꾸 옮겨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허위의식을 유포하려는 술수다. 얼마나 기가 찼으면 ‘성 노예 피해자를 위한 국제의원연합(IPCVSS)’이 유엔 회견을 통해 일본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나섰겠는가. 외교 당국도 이를 적극 지원해 국제사회 공론화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일본 플레이에 뒤통수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10차례에 걸친 한·일 당국자회담 내용을 일정 정도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국익을 핑계로 쉬쉬하는 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국민에게 협상 내용을 알리는 것은 정부의 의무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의 외교 행태가 정상적이라는 허황한 믿음으로 비밀 약속만 지키다간 된통 당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