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 논설주간

결코 가볍지 않은 터키와 오랜 인연
천수백년 만에 다시 손잡은 형제국
11월엔 박 대통령이 '피를 나눈 형제여' 인사 건네길 기대

터키 수도 앙카라에 '한국 공원'이 있는지는 몰랐다. 6·25 참전 터키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1973년 한국 정부가 지어 헌납한 공원이다. 많은 우리 관광객이 다녀갔다는데도 존재조차 몰랐으니 부끄러웠다. 커다란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함께 걸려 있는 공원은 깨끗하고 넓었다. 불국사 석가탑을 본뜬 참전 기념탑 아래 제단엔 부산 유엔공원 터키군 묘역(462명 안장)에서 퍼 온 흙이 담겨 있었다. 6·25에 참전한 터키군은 1만4936명으로 유엔군 중 네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그중 1005명이 전투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165명이 실종됐으며, 2147명이 부상했다.

터키는 6·25가 발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7월 18일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해 파병을 결정했다. 그것도 더디다고 터키 고교생들이 '빨리 파병하라'는 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만5000명 가까운 참전 군인의 상당수가 자원병이었다고도 한다. 21일간 항해 중 배 위에서 미군 장교로부터 미국 무기 사용법을 배웠다.

터키군은 부산 도착 한 달 만인 11월 말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운명처럼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튀르크(터키·돌궐)와 중국은 1300여년 전부터 중국 북쪽과 서쪽 초원지대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때 튀르크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함께 중국에 대적했던 나라가 고구려였다. 대중(對中) 안보에서 이와 잇몸 같았던 두 나라는 조문 사절을 교환하며 우방으로 지냈다. 터키 역사 교과서는 이런 튀르크·고구려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터키 오피니언 리더는 물론이고 웬만큼 교양 있는 사람이면 이 관계를 다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 튀르크가 한국민과 다시 손잡고 한반도에서 중국과 맞서게 됐던 것이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매복 공격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 주한미군인 미 2사단이 궤멸되다시피한 군우리 전투에서 그나마 유엔군의 철수가 가능했던 것은 터키군이 처절한 싸움으로 중공군의 한 귀퉁이를 막은 덕분이기도 했다. 7일간의 악몽 같은 전투에서 병력의 15%를 잃은 터키군은 두 달 만에 경기도 용인에서 복수한다. "알라!"를 외치며 돌격한 터키군은 중공군 요새 안에서 백병전을 벌여 1대40의 수적 열세를 딛고 고지를 모두 점령했다. 30분간의 백병전이 UPI 통신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며 세계에 터키군의 용맹이 알려졌고 미국과 한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았다. 나중에 터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진 곳도 용인이다.

터키는 전후에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변함없이 적극 지지하는 나라다. 비록 지리적으론 멀어도 역사 속에서 나눈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을 '칸 카르데시(피를 나눈 형제)'라고 부른다. 터키어 어순(語順)도 우리와 비슷하고 그들에게도 몽골 반점이 있다. 고구려와의 관계에 이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적지 않은 튀르크인과 방계인 위구르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이슬람 모스크(성전)도 지었다.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렀다. 세종은 이들의 쿠란(코란) 낭송을 즐겨 이를 '회회 조회'로 정례화했다. 그러다 조선이 유교 폐쇄 국가로 가면서 두 민족은 멀어져 갔다. 그렇게 헤어진 지 500여년 만에 1만5000명 튀르크 청년들이 옛 형제국을 찾아와 피를 바쳤다. 앙카라 터키군 참전 기념탑 앞에서 묵념하며 이런 인연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터키는 잠재적 대국이다. 한반도의 3배가 넘는 국토에 인구는 8000만명을 넘는다. 주변 터키계 인구를 합치면 1억5000만명이고 결국 3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맏형이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앙아시아·중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큰 허브다.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만든 대제국의 후예란 자부심도 대단하다. 경제 규모는 우리에 조금 못 미치나 정치·군사적으론 이미 지역 강대국 대접을 받는다. 이런 나라와 1000년 넘는 형제국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일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한국에 온 터키 언론인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터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돌아간 뒤 터키 주요 신문 1면에 '이제 한국을 향한 짝사랑은 그만 하자'는 큰 기사가 실렸다. 터키 국민과 정부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담해졌다. 그런 터키인들이 2002년 월드컵 3·4위전 때 우리 관중들이 태극기보다 더 큰 초대형 터키 국기를 펼치자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고 한다. 터키인들의 국기 사랑은 성조기 좋아하는 미국인들보다 더하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국기는 터키 국민 가슴에서 형제국을 향한 애정을 살려냈다.

오는 11월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거기서 박근혜 대통령이 터키 국민에게 "칸 카르데시"라고 인사했으면 한다. 그렇게 따뜻하게 나누는 형제애 한마디가 어떤 정치·경제 협력보다 그들 마음을 움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