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수 / 논설위원

“거북선을 띄우고 철포를 쏘면 매양 충무공의 웅대한 지략이 생각날 것이다. 통제영을 창설한 지 301년이 되었다. (중략) 아, 국방 요새의 방비를 새롭게 해야 하리니, 임진년과 계사년의 수치를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저 바다의 파도가 영원히 잠잠해져야만 나의 밤잠을 못 이루는 걱정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1892년 고종이 3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하는 민형식(閔炯植)에게 내린 교서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서 평화가 300년간 이어져 왔지만, 이젠 국방 요새의 방비조차 못하고 있다는 교서라 착잡하다.

조선 시대에 충무공 이순신의 역사가 서린 통영의 바닷가에는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어 보관한다’는 뜻의 ‘만하정(挽河亭)’과 ‘세병관(洗兵館)’을 비롯해 열무정(閱武亭), 대변정(待變亭) 등 무력을 키워 대비하자는 뜻의 건축물이 30개를 웃돌았다. 만하정은 이순신을 기리던 정자로 경상도 명승의 첫째로 아름다웠다는데 일제는 만하정 등 많은 정자를 허물었다. 김종태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이 ‘19세기 통영 바닷가의 누정’이란 글에서 이를 밝혔다.

강대국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정세는 고종이 잠 못 이루던 구한말 못지않게 엄혹하다. 특히 의회 민주주의 시발점이었던 마그나카르타 제정 800주년, 광복 70주년이 되는 올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정권은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는 안보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어느 때보다 숨 가쁜 동북아의 엄준한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강력한 경제력·국방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 내부의 통합력이다. 귀감이 되는 사례가 지난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많은 병사가 전역을 연기해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일이다.

이와 달리 14일 병무청 국정 감사에서는 최근 5년간 한국 국적을 저버리고 병역을 면제받은 청년이 1만6000명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통계가 제시됐다. 고위 공직자 아들 가운데 국적 포기 병역 면제자가 18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자 박탈감이 커졌고, 공분이 들끓었다. ‘유전무역(有錢無役) 무전유역’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김덕수 공주대 교수는 이순신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이같이 압축했다. 하지만 청문회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사회지도층의 병역 미필 실태는 국민을 허탈하게 만든다. 제3공화국 때는 병역기피자 수백 명 명단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병역을 기피하려는 자는 중형으로 다스리고 5년으로 된 공소시효도 더욱 늘려야 한다. 양반·평민 가릴 것 없이 병역 기피가 극성을 부렸던 조선은 멸망했고 위대한 지도자가 기원했던 ‘태평성대의 꿈’도 무너졌다. 4대, 5대를 이어 병역을 마치는 ‘병역 명문’이야말로 진정한 명문가다. 누구든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 간 신뢰 기반이 미약한 ‘저(低)신뢰 사회’에서 벗어나 공정사회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