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 정치부 차장

14일 오후 미국 워싱턴 한국대사관저. 워싱턴에서 14년째 열리고 있는 여론지도자세미나(OLS)에 참석한 양국 전현직 정부 인사와 전문가를 위한 만찬 자리였다. 안호영 대사 초대로 황진하 국회 국방위원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도널드 맨줄로 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 등 30여 명이 함께했다.

발언권을 얻은 마크 매닌 의회조사국(CRS) 선임연구원은 미국 내에서 감지되는 한미동맹 이상신호를 조심스럽게 소개했다. “한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의사를 밝힌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불만 제기가 많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그런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는 “발효 3주년을 맞은 한미 FTA가 양국 간 상호 호혜적 통상·투자 확대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투자 기반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한국 정부가 과연 자유무역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자동차, 의약품, 금융 서비스데이터 이전 등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다.

한미 FTA 협상에 관여했던 한 미국 인사는 “솔직히 일본 훼방 놓으려고 TPP 가입 의사를 밝힌 것 아니냐”며 “뒤늦게 한국이 뛰어들어 성가시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온다”고 전했다.

한국에 대한 불만은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이란 말도 동맹국인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가 됐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 도입과 관련해 미국 내에서 “한국 정부가 이슈를 잘못 다뤘다(mishandle)”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미 관계가 ‘한 치의 빛(inch of daylight)’도 샐 틈 없는 완벽한 공조라는 말은 사실과 달랐다.

워싱턴 외교가는 박근혜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8자(字)로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친중(親中) 비미(非美) 반북(反北) 혐일(嫌日). 호사가들의 과장된 수사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노선을 ‘비미’로 분류한 것은 충격적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미국 정보기관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태생적 거부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주장.

한 외교 소식통은 “한중 정상이 만들어 내는 ‘보디랭귀지’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미국이 예민한 것은 사실”이라며 “아버지가 취한 대미 자주노선이 박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믿는 미국 사람도 많다”고 귀띔했다.

영원한 동맹이 어디 있겠나. 1816∼1965년 체결된 73개 군사동맹의 평균 존속 기간은 9년 반 정도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탄생한 군사동맹이 62년간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은 기적이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가장 창의적이고 민첩한 방식으로 진화, 발전하지 않으면 동맹의 노화를 막을 재간도 없을 것이다.

미묘한 시기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미국을 간다. 메르스 사태 때문에 박 대통령의 6월 방미가 무산된 직후여서 더 그렇다. 10명이 넘는 국회의원과 30여 명의 기자를 대동해 대선주자급 행보라는 말도 나온다.

유력인사들과 20∼30분 만나 증명사진만 찍고 돌아오는 속 빈 강정은 아니었으면 한다. 요란한 행보 속에서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는 미세한 파열음을 잘 듣지 못할까 걱정이다. 정확한 처방을 내리려면 정밀한 현실 진단이 이뤄져야 하지 않겠나.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