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 / 여행문화전문기자

헌법학자 유진오가 기초한 제헌 헌법 초안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조선 인민(人民)은'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에 나오는 '인민(人民)'은 1948년 7월 17일 공포한 제헌 헌법에는 '대한국민'으로 바뀌었다. 좌익을 혐오한 우익 작품이라는 말도 있지만 근거가 약하다. 조선인민당 당수(黨首)였던 좌익 지도자 여운형도 '국민개병(國民皆兵)' '국민개로(國民皆勞)'를 논했다. 우파 지도자였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여러 연설문과 담화문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를 썼다. 일반 대중에게 국민과 인민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되찾은 나라 대한민국 구성원으로서 국민이 헌법의 주체라는 묵시적 동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찌 됐건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분단으로 생긴 더 큰 언어적 상실은 '동무'다. 북한의 조선말사전에 따르면 동무는 '혁명 대오에서 함께 싸우는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만인 평등을 주장하며 모든 관습적 호칭 뒤에 붙이는 단어다. 딱히 나라에서 금지한 적도 없지만 어느 틈에 우리 국민은 '동무'를 '동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게 되었다. '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가 되었고,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은 동무가 아니라 친구다. 분단은 이렇게 공동체의 일상 언어생활까지 파괴하고 변형시켰다.

강원도 양구군 동북단에는 해안면이 있다. '돼지 해(亥)'에 '편안할 안(安)'을 쓰는 해안면이다. 원래는 해안(海安)면이었는데 뱀이 들끓는 옛적에 스님 한 분이 '돼지 해(亥)'를 지명에 쓰면 뱀이 사라진다고 해서 바꿨다고 한다. 해안은 금강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보부상과 장돌뱅이들이 일제강점기까지 장(場)을 열던 곳이다. 38선 이북에 있다가 6·25전쟁 후 수복된 마을인데 지금은 인구가 15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어디 붙어 있는 촌동네인가 하겠지만 '펀치볼(Punch Bowl) 마을'이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은 아는 척한다. 6·25전쟁 당시 외국 종군기자가 화채 그릇 같다고 해서 이름 붙인 거대한 분지 지형이다. 공식 지명보다 더 많이 사용돼 영농조합도 펀치볼이고 특산품인 시래기 상표도 펀치 볼이다.

펀치볼을 찾은 관광객은 북쪽 능선에 있는 을지 전망대에 꼭 오른다. 을지 전망대는 6·25전쟁 당시 '모택동 고지'라고 했다. 그 옆에 있는 무명 봉우리는 '김일성 고지'다. 코앞에 있는 비무장지대 안쪽 금강산 자락인 매봉은 '스탈린 고지'다. 모두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의도로 붙인 것으로 원래 이름은 사라졌다. 이 또한 분단이 낳은 상실이다. 북쪽 풍경은 사진도 찍을 수 없다. 군사 시설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2013년 백두대간의 남과 북을 아울러 종주한 사람은 뉴질랜드 경찰관 로저 셰퍼드였다. 오토바이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남북을 종주한 그룹도 뉴질랜드 팀이었다. 아무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해도 분단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실천이다. 통일은 남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점심 한 끼에 차 한 잔비용인 1만 원짜리 통일나눔펀드면, 작되 거대한 우리 스스로의 실천을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우리는 삼천리금수강산을 순례하는 이방인들을 보고 감탄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