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길/전 KBS LA특파원

메르스(중동호흡기기증후군)의 살기가 죽어가고 있다. 사막도 낙타도 알라신의 경전도 먼 엉뚱한 한반도에 잠입해 5000만 공동체를 한 순간에 공황으로 몰고 간 메르스 악령은 깊은 상처를 남기고 태풍 떠나듯 사라지고 있다.

14세기에 1억명의 인명을 앗아간 페스트의 공포를 연상케 하는 메르스 사태는 한 달 반 넘게 온 나라를 혼미에 빠트린 참으로 어이없는 국가적 재앙이었다.

관계자들의 안이한 자세가 이렇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너무도 비싼 교훈을 던져주고 메르스의 코로나 바이러스 RNA는 고사되고 있다.

이제 메르스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한숨만을 내쉴 것인가? 관련자를 철저히 문책하고, 방역체계를 물샐틈없이 개선해 놓을 것인가? 그것들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알베르 카뮈가 걸작 '페스트'에서 날카롭게 묘사한 시장과 의사협회장 등 관계자들의 무지와 무성의, 형식적인 대처 등이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돼, 그 어처구니 없음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들끓는 것은 당연하다. 희생자들의 애석함과 관계자들과 의료인들의 노고, 사회적 손실을 떠올리면 슬픔과 분함을 누구라도 가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하지 말자. 분노에 휩싸인 사회는 면역력이 떨어져 또다른 재앙에 노출되기 쉽다. 크게 보면 의료기관의 미숙함이나 보건관계자의 태만, 정부의 무책임, 대통령의 활달하지 못하고 선제적이지 못한 리더십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매너리즘과 전향적이지 못한 의식의 문제이다.

한국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경제력도 나름 막강해졌다. 그러나 그 풍요를 짜임새 있게 운용하고 발전시키는 철저한 직업의식(professionalism)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다. 막스 베버는 직업의식을 종교적 소명으로까지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직업의식의 핵심은 정신이다. 자기의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최상으로 해결하려는 결기이다. 보건관계자와 의료기관의 안일했던 자세는 비단 그들만의 나태가 아니었고, 정치를 포함한 모든 조직의 지도층에서 하부에까지 지천에 널린 현실이어서, 메르스에게 허점을 노출했다. 세월호 사태를 겪고도 다시 태어나는 범사회적인 개혁에 머뭇거린 업보이기도 하다.

한국은 선진국으로부터 기술과 노하우를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흡수하는 강한 흡입력을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이 고도의 현대사회를 발전시킨 엔진 속에 숨어 작용하고 있는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는 질서와 규범, 공공성, 존중, 도전과 창의가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만 또는 계산적으로만 모방한다면 내공이 탄탄치 않아 뜻밖의 위기에도 당황하게 될 것이고, 어엿한 선진사회로의 지향은 기대하기 어렵다.

큰 재앙을 겪고 나서 외양간을 고치려 한다. 외양간을 고친다고 잃은 소가 돌아올까. 메르스 사태는 한국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무사안일과 책임전가, 이기주의의 매너리즘에서 껍질을 깨고 나와 모두가 함께하는 치열한 장인정신과 번득이는 개혁의지로 거듭나지 않고는 한국은 또 다른 위기에 노출될 수 있다고. 또 이참에 잃은 소 대신에 그보다 더 귀한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를 찾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