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규 / 정치부 차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메시지를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50년 전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국교 정상화에 깊이 관여한 사실을 언급했고 자신의 출신지인 시모노세키가 에도 시대 조선통신사가 상륙한 곳이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를 소개하며 한·미·일 협력 강화까지 강조했다. 사적(私的)인 인연을 앞세워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는 직설적이었다. "과거사를 해결하라"는 본심이 곳곳에 묻어났다.

일본이 혼네[本音·본심]를 다테마에[建前·겉치레]에 교묘하게 숨기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외교에선 이것만큼 효과적인 전략도 없다. 아베는 숙제(과거사)는 피하면서 효과(한·일 관계 개선)만 챙기려 한 것이다. 막판에 5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로 함으로써 최장기 '정상외교 실종(失踪)' 현상을 없애는 데 앞장선 듯한 모양새도 취했다.

일본은 그간 한·일 관계에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펴왔다. 지난 4월 아베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링컨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인권 대통령'이다. '에이브(Abe· 에이브러햄 링컨의 애칭) 앞에 선 아베(Abe)'를 연출함으로써 미국인들의 감성적 지지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일본은 '한·일 정상회담'의 대안으로 아베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자 정상회담' 추진설도 계속 흘리고 있다. 앞에선 한·일 정상회담을 열자면서 뒤로는 중국과의 담판 카드로 한국을 굴복시키겠다는 이중 전략이다. 아베는 오는 9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정부의 대응은 단선적이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관계 정상화와 정상회담은 힘들다는 원칙만 내세웠다. 이로 인해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줬고, 도덕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미(對美) 외교전에서 밀리는 듯한 상황이 됐다. 뒤늦게 '과거사와 경제·안보 분리'라는 투트랙 전략으로 선회했지만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와 경제·안보 문제를 분리하자는 어정쩡한 투트랙 전략은 장기적 대안이 되기 힘들다. 비정상(非正常)을 항구화하는 이 같은 외교적 뉴노멀(New Normal)은 한·미 동맹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대중(對中) 외교 협상력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아베와의 외교전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원칙만을 앞세운 단선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베가 먼저 바뀌기를 기다리기보다 일본과 뭘 주고받을지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박 대통령도 뒤로 빠져 있기보다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필요하다면 아베에게 먼저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대화와 협상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미국의 지지를 받고 일본인들의 부정적 인식도 바꿀 수 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유엔·독일 등과 연대하는 한편 9월 항일 전승절을 앞둔 중국과의 협력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