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 박사]

영어 공부가 아니지만, 영어 표현 하나로 글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Unsung hero’란 말인데요, 교육 받은 영·미인들이 씁니다. 알고 계신 분은 그냥 넘어가세요. Hero는 물론 영웅, Unsung의 sung은 동사 sing(노래하다)의 과거분사로서 수동형, un은 부정(아님)을 뜻하는 접두어(接頭語)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에 대한 우리 말 설명은 ‘노래로 불러 칭송되어야 할 영웅인데 그런 대접을 못 받거나 바라지 않는 숨은 인물’이 될 것입니다.

구글(Google)을 검색해보니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노래 두 개가 나오더군요. ‘이승만 노래’와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영혼의 노래’입니다. 실제는 더 있을 지도 모릅니다. 6.25 때 인민공화국 치하에 잠깐 살았던 대한국민 국민들은 ‘아, 김일성 장군’으로 끝나는 거창한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추앙하는 노래도 있나요? 많다면 이순신, 이승만, 김일성은 모두 unsung hero가 아니라, 제 마음대로의 영작이지만 부사를 하나 보태서 loudly sung hero(억세게 노래로 칭송받는 영웅)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낸 위업에도 불구하고 노래는커녕 그 사실마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버렸다면 그는 분명 unsung hero, 또는 진짜 무명의 영웅입니다.

전쟁 영웅이나 카리스마 정치 지도자가 필요 없는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말은 서민적인 뜻으로 더 쓰입니다. 밖에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사회에 큰 공로를 남기는 보통 사람, 즉 이름 없는 지도자, 숨은 일꾼입니다. ‘얼굴 없는 천사’ ‘날개 없는 천사’, 백의종군 (白衣從軍)과 같은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는 떠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편의상 ‘노래 부르지 않는 지도자’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Clean Up the World for Global Harmony(조화로운 세계를 위하여 지구를 깨끗하게)’라는 기치 아래 지난 12년을 한결같이 봉사로 ‘쓰레기 줍기’ 운동을 벌여온 교민 환경운동 단체인 진우회(進友會) 이야기입니다.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한 아이반 펫치 전 라이드 시장과 다른 외빈이 축사에서 그 모임의 김석환 코디네이터를 ‘unsung hero’라고 불렀습니다. 이 글은 물론 거기에서 착안했습니다.

그 칭호는 그에게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번 행사 때마다 집에 보관해 둔 의자와 텐트와 청소 도구 등 장비들을 새벽에 손수 웨곤에 싣고 나와 끝나면 도로 가져가야 하는 어려운 일부터 이 활동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기를 바라 불철주야 심혈을 기우려 왔습니다.

풍요하나 혼란스런 나라

물론 여기 코디네이터는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말 그대로 코디네이터일 뿐입니다. Unsung heroes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hero는 s가 붙는 복수여야 합니다. 현장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부녀 내조자들, 쓰레기를 담을 봉지나 버켓과 집계를 들고 유서 깊은 파라마타 강변을 뒤지고 다니는 회원들 모두가 더 깊이 숨은 봉사자, 숨은 일꾼이며 이름 없는 히어로들입니다.

진우회의 활동은 교포매체에 그간 여러 번 보도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내용의 글을 되풀이하기보다 이름없는 히어로, 즉 지도자라는 개념을 우리 민족, 우리 사회, 우리 커뮤니티라는 큰 틀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떠들썩하게 노래 부르지 않고, 조용히 숨어서 나라를 위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세계경제 10위권에 진입한 한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릿고개는 먼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 나라는 평화스럽고 사람들은 행복한가요? 고국에 가 볼 때마다 느끼는데요,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는 역동적이나 불신과 적대감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 부재, 구성원간의 큰 거리감(social distance), 세계적으로도 높은 자살률은 그 일부일 따름입니다.

대안은 무엇일까요? 학자와 전문인과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대로 많습니다. 어차피 이 짧은 공간에 길게 쓸 수도 없지만,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공직을 맡은 사람과 국민이 개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먼저로 하면 문제는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 말고도 선진 사상과 이론, 법과 제도, 과학기술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 덩어리인 것은 그것들을 운영하는 지도자들이 개인 이익을 먼저로, 전체의 이익은 뒤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개인 이익을 멀리 하고 전체 이익을 위하는 방법을 말하자니 곧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노래 부르지 않는 지도자’와 일꾼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지금 우리 사회와 민족에 없습니다.

굵은 자리와 직함을 노려 대선 때마다 줄서기에 나서고, 밀어서는 안 되는 정권과 인물의 하수인을 자처하고, 공천을 못 받으면 뛰쳐나와 이합집산을 하는 현상, 모두 이름 없이 숨어 일은 안 하겠다는 것 아닌가요. 공명심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국민의 책임도 큽니다. 노래 부르지 않는 지도자와 인물들을 찾아 대접해주어야 하는데 안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영·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관운(官運)이라는 말을 잘 쓰고 그걸 대단히 부러워합니다. 사회가 그것을 조건 없이 큰 출세로 인정하고 대접해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과 사법부도 믿을 수 없게 된 오늘 한국사회와 민족이 기대야 할 마지막 보루가 기독교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거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하는’ 겸손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지도자들은 남이 알아주건 말건 소리 없이 봉사하는 일꾼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어야겠는데 어디 그런가요? 목회자라는 이름만 해도 족할 텐데 거기에 더하여 무슨 총장, 대학원장, 총연합회장, 총협회장, 총본부장, 사무총장, 박사, 학장, 원장 등 그 많은 직함과 화려한 이력을 홍보합니다.
역할 따라 여러 직함을 만들어야겠지만 그렇게 안 하면 교회를 잘 섬기지 못할까요?

회장 직함제마저 배척하는 진우회가 이러한 사회풍토를 바꾸는 작은 씨알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