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태 / 수석논설위원

대통령이 출국장 전용기에 올라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해외순방 출국 때의 익숙한 풍경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공포가 전국을 엄습하고 있는 지금 그런 풍경이 펼쳐진다면? 많은 국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제 고심 끝에 외교적 결단을 내렸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던 방미 일정(14~18일)을 전격 연기한 것이다. 외교적으로는 큰 결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메르스 초기 대응 실패와 잇단 후속조치 실책으로 감염이 확산되는 바람에 '무능정부'라는 국민적 비판이 드센 상황을 감안하면 대통령의 방미 연기는 그래도 잘한 결정이다.

박 대통령의 외교적 결단이 요구되는 중차대한 과제가 또 있다. 바로 극도로 악화된 한·일관계 개선이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 이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양자 정상회담을 아직 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신사 참배,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영유권 주장 등이 족쇄가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외교적 현안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족쇄로
한·일 관계 최악의 상태 지속
대일 실리외교 전환 나서야

과거사·영토와 경제·안보 분리
수교 50주년 기념식 대통령 참석
부산서 양국 정상회담 가졌으면

박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의 변화를 촉구해 왔다. 얼마 전 한·일현인회의 원로들을 접견했을 때도 "과거사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을 통해 양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는 이제 52분만 생존해 계신다. 이분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일본 측의 용기 있는 결단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데 일본 측의 용기 있는 결단은 아베 총리가 내려야 한다. 우리 국민이 볼 때 그는 참으로 밉상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두 번째 총리를 하고 있을 만큼 권력 구도의 정점에 있다. 일본 우경화의 기수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반성'이라는 용어만 쓸 뿐, '사죄'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행보와 기조로 볼 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과 관련한 일본 정부 차원의 충분한 배상 조치는 상당 기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아베 총리를 상대로 '과거사를 직시하고 사죄하라'고 언제까지 촉구만 하고 있을 것인가. '쇠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어 보인다. 이제 외교 전략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과거사·영토 문제와 경제·안보·문화 문제 등을 분리 대응하자는 것이다. 한·일 간에 종전 70주년(8월 15일)과 수교 50주년(6월 22일)은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 8월이면 박 대통령 임기도 절반에 도달한다. 지금부터 두 달 정도가 한·일관계 개선의 골든타임이다. 대일(對日) 외교의 원칙은 마음에 품되 대승적 차원에서 먼저 손을 내밀면 어떻겠는가.

오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열린다. 양국 정부는 각각 상대국 정상에게 초대장을 보낸 상태다. 우리나라는 '아베 총리가 도쿄에서 열리는 기념식(주일 한국대사관 주최)에 참석하면 박 대통령도 서울에서 열리는 기념식(주한 일본대사관 주최)에 참석할 것'이라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일본 측에 전했다고 한다. 국격(國格)을 고려한 입장이겠지만, 조건 없이 박 대통령이 서울 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먼저 선언하면 어떻겠는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방일, 22일 도쿄 기념식에 참석하고 한·일 외교장관회담도 하자고 치고 나가면 더 좋지 않을까.

8·15 광복절에 박 대통령이 아베담화에 대한 요구사항뿐 아니라 한·일 정상회담을 먼저 제의하면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한·일 정상회담이 과거사 청산과 별개로 개최돼야 한다는 국민 여론도 70%에 이른다. 지난 8~9일 제주에서 열린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대토론회에 참석한 양국 언론인들도 한·일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를 제언했다.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양국 정상이 얼굴을 맞대고 회담을 갖다 보면 돌파구를 찾을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한·일 간에 과거사 문제는 지울 수 없는 멍에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 이후 500명 가까운 세계 학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고 집단성명을 냈다. 이어 일본의 4개 역사학회 6천900명 회원들도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지난 8일에는 일본 지식인 281명이 8월 15일 발표할 아베담화에서 사죄를 표명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세계와 일본 내 여론이 아베 정권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그와 병행해 대일 실리외교를 펼 필요가 있다. 국익의 극대화를 위한 외교 전략의 전환이 결코 굴욕외교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한·일 정상회담 장소로는 서울이나 도쿄 대신 7천 년 전 아득한 신석기 시대부터 한·일 교류를 시작했던 부산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