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경 / 동국대 석좌교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일부의 비난이 있지만 이란과 핵협상을 타결했고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했다. 과거보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원칙에 기초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외교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외교당국엔 신선한 충격이었을까?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중·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 종전 후 처음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재무장을 공식화했다.

언론에서 한국만 고립됐다고 비판하자 외교당국은 오해라고 펄쩍 뛴다. 외교당국은 일본 우익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이유로 행동반경을 스스로 제한하여 일본 재무장을 한·미·일 간 문제가 아닌 미·일 간 문제로 축소했다. 잘못된 역사 인식은 바꿔야 하지만 중요한 국익을 놓치는 것을 정당화할 순 없다. 과거사 인식보다 더 긴박한 외교 이슈는 일본 재무장에 따른 동북아 안보 질서 변화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이 가시화되었는데도 당국은 `우리와 협의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앵무새처럼 말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5만명이 미국·영국의 묵인하에 한반도에 상륙했을 때 대한제국의 사전 동의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전쟁 와중에 힘의 논리 말고 무슨 논리가 통하는가? 새로운 동북아 군사 지도에서 국군의 위상이 뭔지가 문제의 핵심인데, 이와 관련해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알려진 게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한국은 일본을 지키는 전초기지고, 유사시 한반도가 일본 자위대 작전 영역에 편입되며, 정보 수집 능력과 무기 체계가 뒤떨어진 국군이 일본 자위대의 지휘하에 놓이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외교 문제는 없다. 과거사 인식에 매달려 한·미 관계를 어색하게 하고, 중국의 지지를 얻으려 취했던 외교 행보를 통해 얻은 게 뭔지 결산할 때가 되었다.

과거사 인식으로 각을 세우기보다 치욕의 역사를 다시 쓰지 않기 위해 `주권 존중`이라는 상투적 외교 수사 대신 국군이 정보 수집 능력과 화력에서 일본 자위대와 대등한 전투력을 갖추도록 보장받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에 대비할 새로운 안보 질서를 만드느라 고심하는 미국에 `과거사 반성 없는 일본을 믿으면 안 된다`고 설득하는 한편, `안보·경제 분리`라는 명분으로 중국과 가까워졌다. `사드` 배치 문제로 민감한 때 전직 국가안보실장을 주중대사로 보냈다. 설득하러 갔다 해도 왜 공격도 아닌 방어 체계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는지 지한파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값싼 박수` 발언이 터졌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기 전에 미국·중국이 한국을 중량급으로 보는지 파악해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이 중량급에는 통하지만 경량급은 모두에 버림받는다. 경량급인 사담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관해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다 화를 자초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북중상호방위조약이 대치하는 한 `안보와 관련된 전략적 모호성`은 어불성설이다. 외교 수사에 갇혀 있지 말고 냉정하게 돌아보며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했고 재원 확보를 위해 아베노믹스를 허용한 것`이라는 가정하에 복기해 볼 필요도 있다.

국방당국은 국군이 일본군과 대등한 지위에 있도록 부족한 첨단장비 도입과 유사시 한·미·일 군사협력 체계에 관해 세밀한 전략을 세우고 미국·일본과 끈질기게 협상해야 한다.

원론적 얘기나 주고받으면 안 된다. 트루먼 독트린의 뼈대를 설계한 `Mr. X(조지 F 케넌)`는 "외교정책 목표는 사건의 전개에 따라 상대적이므로 외교정책의 기본계획은 방향만 제시할 수 있을 뿐 최종 결과를 제시할 수 없다"고 했다.

게임 중에 한 선수만 집중 방어하면 다른 선수에게 골을 먹는다. 동북아 다자 게임의 많은 양자 관계 중 어느 한 양자 관계의 최적해(最適解)에 집착하면 전체 게임의 최적해에서 멀어지게 됨은 수학적으로 자명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