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 논설위원]

1962년 4월 30일 백악관에서 화려한 만찬이 열렸다. 노벨상 수상자 49명이 주인공이었다. `대지`의 작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탄 펄 벅은 케네디 대통령과 아시아 문제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한국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케네디가 물었다.

펄 벅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우리가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요. 일본이 한국에서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펄 벅은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케네디는 그녀에게 아시아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극도의 무지를 드러냈다. 그녀가 이듬해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이 끝날 때까지 한국사를 그린 소설 `살아 있는 갈대`를 낸 것은 미국인이 모르고 있는 이 한 맺힌 나라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펜실베이니아대 영문학 교수인 피터 콘이 `펄 벅 평전`에서 전한 이야기다.

나는 얼마 전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에게서 그녀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2차 대전 때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활동한 로버트 마이어스 전 카네기협회 회장의 회고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조선과 미국은 1882년 수호조규를 맺었다. 둘 중 한쪽이 제3국의 억압을 받으면 서로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갈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러·일전쟁을 중재해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까지 탄 그였다.(실제로 미·일은 필리핀과 대한제국 지배를 상호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펄 벅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2차 대전 중 그녀는 "우리는 한국을 두 번 배신했다"고 썼다. 일제의 주권 강탈 때 도와주지 않은 것이 그 첫 번째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믿고 한국민이 분연히 일어났을 때 다시 외면한 것이 그 두 번째다. 그녀는 "대부분 미국인들은 그 배신에 대해 알지 못하겠지만 한국인들은 약소국의 자유에 대한 윌슨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다"고 했다.

 

펄 벅과 케네디. <사진 제공〓jfklibrary.org>

그런 그녀이기에 케네디의 말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어떻게 했는데 미국 대신 `역할`을 하도록 끌어들이려 한단 말인가.

오늘의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구한말과 똑같을 리는 없다. 지금은 중국이 조미수호조규에 `조선은 대청제국의 속국`이라고 명시할 것을 요구하던 시대가 아니다. 한·미는 130여 년 전 수호조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동맹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외교적으로 그 시대 못지않은 어려움에 부딪힌 것은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것을 보고 펄 벅이 케네디에게서 받은 것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워싱턴의 어디에선가는 케네디가 한 것과 같은 말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을 그 말들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우리 잘못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한·미·일 삼각관계의 차가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워싱턴과 서울의 온도 차를 그대로 전하지 못한 외교당국 책임이 무겁다.

문제는 앞으로다. 사흘 후에는 미국 외교 수장이 한국에 오고 한 달 후에는 우리 대통령이 미국에 간다. 석 달 후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가 짙게 밴 종전 70년 담화가 나온다.

우선 대통령과 외교장관부터 유연해져야 한다. 듣기 싫은 이야기에 귀를 더 열어야 한다.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라거나(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보라(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말은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흘려들은 대가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때다.

외교 무대에서 목표와 전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 위안부와 침략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결과물이지 모든 일의 출발점으로 삼을 전제조건이 아니다.

펄 벅은 한국을 보석 같은 나라라고 했다. 한 달 후 미국 조야에서 그런 찬사가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