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호/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29일 성공적인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을 마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워싱턴DC에서 가장 비싼 호텔을 같은 날 오후에 찾았다. 미국 내에서 '머니 파워'로 영향력이 큰 사사카와 평화재단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400여명의 '친일(親日)' 인사들을 향해 그는 "강한 일본이야말로 미국에 가장 좋은 이익이고, 강한 미·일 동맹은 이 지역과 세계에 가장 이익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의회에서 "미국이 일본에 민주주의를 알게 해줬고, 다양성을 보고는 '대단한 나라'라고 느꼈으며, 훌륭한 실적 위주 시스템을 일본에서 따라 하다 야단맞았다"고 미국을 칭송하면서 '아양' 떨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시종일관 당당했다.

이 재단 미국 이사장인 데니스 블레어 전 DNI(국가정보국) 국장이 오히려 공손했다. 그는 "공백을 깨고 총리로 재 부활한 비결이 뭐냐" "2020년 도쿄올림픽은 어떻게 치를 생각이냐"며 '의전' 질문을 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최근 "한국 역시 베트남전쟁 때 아주 무자비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일본의 A급 전범 용의자였던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설립한 이 재단이 미국의 싱크탱크에 퍼붓는 돈만 연간 35억 원이 넘는다. 아베 총리는 '갑(甲) 중의 갑'일 수밖에 없다.

아베 총리의 이번 방미는 '경제적 동물' 일본의 완벽한 부활을 선언하는 자리였다. 파이낸셜타임스 편집장 출신인 에이먼 핑글턴이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 자체가 돈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지만 아베 총리는 가는 곳마다 '돈질'을 했다. 의회 연설에서는 "28억 달러(약 3조원)를 괌의 미군기지 개선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말했고,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비확산 공동 선언문에서도 "2500만 달러(약 270억 원)를 원자력 연구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심지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사죄를 사실상 요구하는 AFP 기자의 질문에 "유엔 총회에서 분쟁 지역 성폭력 근절에 앞장서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성발전기금에 1200만 달러(약 128억원)를 지원했고, 올해도 2200만 달러(약 235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엉뚱한 대답도 했다. 가는 곳마다 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제는 '경제 동물 일본'이 미국에 먹힌다는 점이다. 일본은 미국에 3500억 달러(약 374조원)를 직접 투자했다. 둘째로 많은 액수를 투자한 나라다. 국방 예산도 늘려 미국산 F-35 차세대 전투기, 글로벌 호크 무인 정찰기,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을 구매한다. 중국의 급부상을 막아야 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고맙다. 미국의 예산 부족으로 생기는 전력(戰力) 공백을 지난해 마이너스 성장(-0.5%)을 했는데도 돈을 풀어 메우겠다는 일본이 어찌 안 예쁠까. 환율 조작 기미만 보여도 한국에는 법석을 떠는 미국이 아베 총리의 '돈 찍어내기'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같은 편'을 외치는 게 워싱턴의 현실이다.

이렇게 돈을 쓰는 일본 앞에서 미국 하원 의원 25명이 아베 총리를 향해 "과거사를 사과하라"고 연판장을 돌린 것은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명분만으로는 누구도 설득 못 한다. 한국 외교가 워싱턴DC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 길을 찾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