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석 / 논설위원

미·일 유착 이면에 깔린 한국피로증
다음 수순은 한국인 분노 적당 관리
한국외교, 낡은 틀 깨는 새 전략 필요

미국 조야에 ‘한국피로증’이 상당하다고 한다. 한국이 너무 과거사 문제에 집착해 지겨워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일본이 과거사를 이미 사과하지 않았느냐’는 인식도 이런 피로감에서 나왔을 것이다. 외세지배를 받지 않은 미국 입장에서 한·일간의 오랜 다툼이 식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근 미국 고위 관료들에게서 감정적 불편함을 넘어 역사를 편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조짐마저 보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며 역사를 한낱 정쟁거리로 비하한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나,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무자비했다”는 데니스 블레어 전 국가안보국장, “베트남은 과거를 제쳐놓고 한국과 관계정상화에 합의했다”는 로버트 샤피로 전 상무장관 등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감정이 피로를 넘어 이율배반이나 아집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 황유석 논설위원

일본의 식민지배와 그로 인한 역사·영토 문제를 베트남전쟁이나 진주만 공격 같은 군사적 시각으로 본다면 한국피로증은 해소되기 어렵다. 한국, 중국의 반발은 아랑곳없이 왜곡의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는 일본의 행보도 미국의 한국피로증에 편승한 측면이 크다.

한국피로증에 걸린 미국이 우리를 대하는 다음 수순이 어떨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미동맹은 린치핀’ 같은 외교적 수사(修辭)를 앞세워 한국의 분노를 적당히 관리하는 것이다. 마치 북핵 관리를 명분으로 대북대화를 방치하는 식이다. 분노가 일정수준 이상 분출하지 않게 할 정치·군사·외교적 수단은 미국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서 아시아재균형 전략에 따른 미일 안보유착이 톱니바퀴 물리듯 착착 진행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가끔씩 한국 편을 드는 듯한 논평을 내는 한편으로 아베 총리를 의회 합동연설장에 서게 하고, 평화헌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위대와 미군의 일체화를 가속화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볼 광경이 될 것이다.

동북아에서의 우리의 지정학적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 경쟁구도가 격화하고, 미국의 대리인으로서 일본의 팽창도 굳어지는 추세다. 정작 북핵문제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쳐진 이슈가 돼가고 있다. 반면 우리는 며칠 전 끝난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의에서 보았듯, 일본에 전향적 자세변화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촉구외교’ 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3일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이번에 미·중 정부가 한결같이 '위대한 전략가'라고 애도성명을 낸 것은 양국의 전략적 가치를 국익화한 그의 실용주의 전략에 대한 평가다. 미국의 핵심동맹인 호주는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에 적극 가담하면서도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도 목전에 두고 있다.

미국에는 “일본과의 밀착을 좀 살살해 달라”고 하고, 일본에는 “제발 과거사를 반성해라”는 식의 ‘읍소외교’로는 더 이상 우리 국익을 관철시킬 수 없다. 낡은 프레임을 깨는 새로운 전략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5월 러시아 전승70주년 기념행사는 달라진 우리 외교전략을 내보일 좋은 기회다. 박근혜 대통령의 참가 여부에 따른 손익계산서는 이미 다 나와 있다. ‘동맹국 미국에 대한 배려’와 ‘북한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중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성과에 관계없이 국제사회에 전하는 메시지의 무게감도 무시할 수 없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방치한다고 해서 우리까지 덩달아 손을 놓고 있을 이유는 없다. 결국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문제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외교·안보의 판세를 흔들 수 있는 주요 변수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 외교가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