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명 / 정치부 차장

▲ 서정명 정치부 차장

'잃어버린 20년'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일본 경제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닛케이 평균 주가는 3월 들어 지난 2000년 4월 이후 처음으로 1만9,000선을 뛰어넘었고 부동산시장에도 훈풍이 돌고 있다. 지난해 4·4분기 성장률은 1.5%(연율)로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났다. 경기 호전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하듯 도요타자동차·히타치·파나소닉·미쓰비시 등의 대기업도 기본급을 올렸거나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쏘아 올린 '세 개의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면서 '아베노믹스'가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화살인 대담한 금융정책과 두 번째 화살인 기동성 있는 재정정책은 양적완화(QE)와 확장적인 재정 풀기를 통해 엔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고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에 불을 지피고 있다. 세 번째 화살인 지속성장 전략은 노동시장 개혁, 서비스 산업 규제 완화 등 경제 혁신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베 총리가 경제 분야에서 뽑아 든 세 개의 화살은 일본 경제를 갉아먹는 암세포를 정확하게 포착해 예리하게 도려내는 메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옳은 판단을 했다.

주말인 21일 서울에서 한중일 3국 외교장관회의가 열렸다. 일본군 위안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댜오)열도, 과거사 인식 등을 놓고 마찰과 갈등을 빚어온 3국이 대립의 시대를 끝내고 협력의 시대로 넘어가자는 취지로 2012년 4월 이후 처음 만났다. 3국 외교장관은 국제사회의 기대와 여론을 의식한 듯 연신 터지는 카메라를 향해서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지만 회의 내용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 회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한중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모두 편리한, 가장 빠른 시기에 개최를 위해 노력한다'는 어정쩡한 입장만 내놓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일본이 역사를 직시해야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며 아베 정권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작심한 듯 비판하기까지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한일 또는 한중일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공감을 표하고 있지만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결국 한중일 정상회담을 통해 3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상호 경제영토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아베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아베 총리가 외교·안보 분야에서 '네 번째 화살'을 꺼내 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아베 총리는 오는 8월 아베 담화를 내놓을 예정이다. 한중 양국은 담화 내용을 보고 정상회담 개최 및 관계 개선 여부를 신중하게 저울질할 것이다. 이달 초 일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아베 총리의 면전에서 '전쟁 범죄를 사죄한 독일처럼 과거를 반성하고 양심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베 총리가 역사 인식에서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엄중한 꾸짖음이다.

아베 총리가 8월 담화에서 보수 세력 결집을 위해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면 한국과 중국은 메르켈 총리보다 더 강한 톤으로 아베 총리를 비판할 것이고 이 경우 3국 협력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아베 총리가 '과거사 반성'이라는 네 번째 화살을 쏘아 올려 동북아 협력 시대를 열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한중일 갈등 시대를 고착시킬 것인지 역사 앞에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