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열 / 논설위원

‘정시역사(正視歷史) 개벽미래(開闢未來)’. 지난 21일 서울의 한`중`일 외무장관 회의에서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을 겨냥한 말이다. ‘역사를 바로 보자’와 ‘미래를 열자’를 뜻하는 문구다. 왕이 부장은 회의가 끝나고 공동 기자회견에서 “여덟 글자가 발표문에 들어간 것이 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라고 할 만큼 의미를 두었다.
왕이 부장의 이 말은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침략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에 대한 중국의 불만이 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중`일의 꼬인 문제를 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개벽의 어려움을 역사로 배웠다.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의미인 개벽이란 낱말은 꽤 익숙하다. 이 말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가 100년도 넘기 때문이다. 이를 배움의 혜택이라고는 누려보지 못한 뭇 백성에게까지 퍼뜨린 주인공은 바로 동학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다. 철저한 신분사회 조선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은 우리말로 된 가사를 통해서다. 양반 상놈 없는 평등한 새로운 미래를 위해 개벽이란 단어를 썼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가련하다/전세임진(前世壬辰) 몇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한울님이 내몸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근심 말고 안심하소 이 가사 외워내서/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보세.’ 그는 이 안심가(安心歌)뿐 아니라 용담가 등에서도 개벽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며 새 세상을 외치다 대구에서 참수됐다.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도 평등하고 외세에서 벗어나는 조선을 위해 개벽이란 말로 새 세상 만들기에 앞장서다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개벽은 조선 패망과 일제 통치로 또 멀어졌다. 3대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1920년 잡지 ‘개벽’까지 창간, 개벽 독립에 나섰다. 이후 광복으로 개벽은 됐으나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개벽 세상을 향한 선조의 희생, 특히 최시형의 삶은 1991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개벽’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처럼 낯익고 피와 희생을 떠올리는 개벽이란 말을 중국의 왕이 부장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스럽다. ‘개벽미래’라는 말을 통해 전한 중국의 숨은 뜻을 일본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