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악화 일로를 달리는 한일간 과거사 분쟁 중 일본 편을 두는 듯 한 웬디 셔먼 미국무부 정무차관의 최근 발언이 한국인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곧바로 미국 정부는 진화에 나선 감이지만 이 뜻밖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복잡합니다.

저는 한일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더욱 멀리 호주에 살면서 한국의 한국인들보다 정보가 더 어두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인의 입장에서 수십 년 동안 한일관계의 궤적을 지켜봐 온 안목과 대학시절 공부한 국제정치학 지식을 가지고 판단할 때, 미국정부가 뭐라고 하든 그녀의 발언은 한일관계를 포함한 미국의 대 동아시아정책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알려주는 애드벌룬인 동시에 풍향계라고 봐집니다. 괜히 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외교 관계란 안보 관계의 경우처럼 속내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정보를 독점하는 국가들은 진실을 교묘히 숨기기 때문입니다. 외교적이니 하는 말 자체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하지만 핵심은 언제나 국제정치학의 기본 테마인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에 있습니다.
그걸 알면 한일관계와 그를 대하는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의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1905년의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 후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그 점에서 일관해 왔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1965년 한일간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한국사회가 반대 데모로 거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한일기본협약 체결 과정에는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 때 저는 직업상 미국 국무성 관리들하고 가까이 지내 봐 잘 아는데요,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데모는 야당의 사주를 받은 철 모르는 학생들의 짓이라고 뒤에서 혹평을 했습니다.

만약 그때 지금의 골치덩어리인 독도나 위안부 문제를 단단히 매듭을 짓고 넘어가겠다며 버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고 돈이 급한 군사 정부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겠지요.

‘역사는 되풀이 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명언대로 또 한번의 시련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50년 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미국이 그 세력권에 있던 일본과 한국을 한 공동 번영권으로 묶어 팽창하는 공산주의 세력 앞에 벌어질 수 있는 아시아의 도미노 현상(Domino 게임에서처럼 하나가 무너지면 다음 여러 개가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을 막는 방패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뭔가요?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통합되었으면서도 팽창주의를 견지하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하여 일본을 기축으로 하는 대 동북아시아정책의 새 틀을 짜야 하는 미국의 국가이익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이 보릿고개를 벗어나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박정희 군사 정권의 덕이라고 말하는 보수층의 주장이 한국에서 설득력을 얻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경제발전은 상당 부분 청구권이라는 이름의 일본 돈의 유입과 그 길을 튼 미국의 국가이익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혜택을 듬뿍 입은 보수와 기득권층이 새로운 미국의 압력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궁금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대국인 중국으로 말을 바꿔타야 할까요?

어느 경우에나 국가의 잠재력이 관건입니다. 한국의 경제력과 국방력은 과거와 비교가 안 되게 커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국가의 잠재력은 아닙니다. 국민의 저력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국민 통합이 시급합니다. 지금처럼 너무 크게 벌어진 빈부 격차와 기회의 불평등, 심각한 지역감정, 만연된 불의, 그리고 사기와 불신, 등으로 국민 정서가 갈기갈기 찢기어있다면 한국은 또 한번 각축하는 강대국들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