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 김삼오/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 박사

영미 사람들의 이름(姓) 가운데는 재미있거나 괴상하다고(funny)할만한 게 더러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두가지 예를 든다면 미스터 블러드(Blood, 피), 라이스(Rice, 쌀), 핸드 (Hand, 손), 뭐 이런 것 들입니다.

반상(班常)제도가 있던 조선조시대라면 딱 상놈 집안으로 오해 받기 쉬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이름 시비가 아닙니다. 제가 20년도 지난 1990-92년 멜번에서 일할 때 호주의 연방 이민부장관이었던 게리 핸드(Gerry Hand)씨의 이야기로 글을 풀어나가기 위하여서입니다.

멜번 지역구 출신이지만, 그래서보다 이민정책의 책임을 맡은 정치인으로서 커뮤니티의 의견을 수렴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곳 한인 대표 10여명과 함께 간담회를 갖고 싶다는 기별이 한인회장을 거쳐 왔습니다. 제가 그 10명 중 한 사람으로 끼어 사전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간담회에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하면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으니 미리 의제와 전략을 잘 조정해야 한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합의가 된 게 없이 간담회 날이 왔습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였습니다. 복지활동을 하신다는 한 분은 한인들의 복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직을 하셨다는 연로한 또 한 분은 6.25때 호주군이 와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싸워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역시 길게 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이 한 발언을 여기 일일이 적지 못합니다만 간담회는 중구난방이 되었습니다.

장관은 답답한 듯 옆에 있는 비서에게 ‘Get that!’(받아 적어요!)를 연발하다가 떠나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체면상 뭐라고 한마디 말했지만 요령부득이었을 것이고 큰 기여를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영어 실력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말한 것인가에 대한 준비물이 없다면 우리말로도 요령부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발언자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대표하는만큼 정제된 커뮤니티의 필요를 알아야 하고 그걸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놓지 않고는 그저 인사 아니면 잡담이 되기 쉽습니다.

왜 별로 즐겁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을까요? 그걸 설명해보겠습니다. 요즘 시드니에서는 표를 의식하는 호주 정치인들이 한인사회에 대하여 전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접근해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할까가 관건입니다.

이들 호주 정치인들을 대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한인회장과 다른 한인 단체장들, 한국계 시의원들입니다. 양측이 참석하는 행사에 가보면 의례 이 분들이 호주 인사들과 구면인 듯 따뜻한 악수는 물론 서로 껴안는 등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당연하며 좋은 일입니다. 먼저 서로 잘 알아야 뭐가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로비는 행사장이 아니라 뒤에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것이니 평소 이들 대표들이 호주 정치인들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무슨 말을 전하는가가 궁금합니다.

이들 한인 인사들은 호주 쪽으로 봐 커뮤니티의 리더이고 우리 쪽으로 봐서는 우리 커뮤니티의 뜻을 대변해야 하는 대표자들이기 때문이지요.(실은 시의원은 호주 시민의 자격이지만 한인이기 때문에 그 한도에서 커뮤니티를 대변한다고 봅니다)

한 사람은 기백만불이 든다는 코리안 가든 건립, 다른 사람은 호주달러 가치의 추락이나 기업의 어려움, 또 다른 사람은 북한 인권, 독도와 위안부 문제, 또 다른 사람은 노인 복지가 중요하다 등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의견이 한 방향으로 잘 모아져야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커뮤니티의 필요와 생활에서 경험하는 애로사항과 그에 대한 우선순위를 우리끼리 토의를 거쳐 합의된 기본 문서 같은 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때 한호지역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한인백서란 문서를 커뮤니티가 만들어 놓을 필요성을 글과 워크숍을 통하여 여러 번 제안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였으나 아무것도 된 게 없습니다. 이제라도 불과 몇 쪽의 소책자로라도 국·영문으로 된 비슷한 문서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복잡한 주장이나 건의 사항은 먼저 문서로 전달한 다음 말로 보충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 하나 없이 우리가 어떻게 주류 정치 참여나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고국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한인 차세대 지도자들을 뽑아 한국을 다녀오게 하는 프로그램을 벌써 몇 년째 실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차세대 지도자가 구비할 지식과 이론과 자질은 한국이 아니라 현지에서 배워야 할 일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나 돈이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