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식 / 부경대 강사

▲정훈식 부경대 강사

임진왜란 한가운데서 나라의 운명을 부여잡고 있던 류성룡. 그는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왜군이 물러간 뒤에도 전후 처리에 몰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북인(北人)에 의해 탄핵을 당하고 그 길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폐허가 된 조선으로서는 불행이었지만 뒷날 우리는 이 일로 엄청난 기억의 콘텐츠를 얻게 되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남긴 '징비록'은 나라의 복구에 매진할 시간과 맞바꾼 기록인 셈이다. 이 기록은 전쟁백서와 같이 난리의 시말과 참상을 방대한 자료로 구축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황의 핵심만큼은 소상하고 온전하게 전한다.

'징비록'은 뜻 그대로 후세에 또다시 이와 같은 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남긴 책이다. 즉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이것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메시지가 핵심이다. 특히 돋보이는 점은 그의 서술 시각이다. 비록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류성룡의 서술 시각이 왜군에게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조정의 대응과 명의 속셈, 그리고 여진의 움직임까지 포착하고 있다. 이 전쟁과 관련된 유관 주체와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을 보여준다. 이렇듯 포괄적인 국제 감각은 후대에 박지원이 열하에서 보여주었던 국제정세에 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징비록'의 진가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책은 전후 대일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하지만, 조선은 다시는 일본이 침략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보내는 정책적 결단을 내렸다. 그러니 조선통신사는 비록 칼을 들지는 않았으나 상대방의 무력을 억제한 최전방의 전략무기와도 같았다. 물론 이 시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위기와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국서조작사건, 사행이 살해되는 사건, 통신사 빙례를 둘러싼 갈등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 이것이 전쟁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몸을 던져 막은 것이 바로 조선통신사다.

조선통신사는 200년간 전쟁 억지력을 펼친 것에 머물지 않는다. 병법의 상식대로 적을 방어하고 쳐들어온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을 잘 알아야 한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움직임과 동향, 그리고 그 사회의 성격과 수준을 알기 위해 다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축적한 일종의 연구센터였다. 여기에서 축적된 데이터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친다. 정약용과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의 학자들이 더는 일본을 오랑캐로 간주하지 않게 된 데는 조선통신사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정세는 변하여 1811년을 끝으로 '징비'의 실질적 구현체인 조선통신사의 소임은 끝났다. 이에 따라 조선은 새로운 대일정책과 지일의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몰락의 위기에 몰린 조정에는 그러한 생각을 할 여유와 의지가 없었다. 더는 대응할 여력을 상실하자 다시 일본 안에서는 정한론이 부상하고 침략의 야욕이 커졌던 것이다.

최근 한일 관계와 맞물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기억이 끊임없이 현재로 호명되고 있다. 새 천 년 벽두부터 소설 '칼의 노래'가 동인문학상을 받더니, 그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쉼 없이 새로운 버전으로 가공되고 있다.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을 끌어모은 '명량'과 새로 TV에 등장한 드라마 '징비록'에서 보듯 지난해와 올해는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과 동아시아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임진왜란은 절대로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난 사건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호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징비록'은 텍스트에 담긴 내용을 잘 재현하는 것에 충실하다. 그를 통해 우리는 류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재미있게 읽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드라마를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막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세우는 일들은 모두 기억의 정치다. 기억 콘텐츠를 수많은 버전으로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문화로 포장한 기억의 정치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기억 대상을 둘러싼 핵심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간과하거나 숨기는 것에 있다. 전쟁 재발을 위한 실질적 방도를 취하라는 것이 '징비록'의 핵심 메시지다. 만약 그 메시지만 빼고 나머지만 보여준다면 이야말로 '징비록'을 의도적으로 오독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선통신사 이후 '징비록'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대일정책은 200년간 부재 상태임을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