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3.1.31 화 14:40
재외선거, 의료보험
> 정책/포럼 > 포럼
2007 교포정책포럼 : 제4주제 지정토론주제 : 중국의 소수민족(조선족)정책은 왜 민감한가?
편집부  |  admin@oktime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9.09.21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제4주제 지정토론


1. 조선족의 이동에 따른 역할과 : 김범송(조선족사회문화연구소 연구원)

고국에 와서 고국이 한민족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고 집사람도 재외동포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서울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했어요. 지금 서울대병원의 연구원으로 있고 저도 박사 학위를 수료했고 고국의 정을 듬뿍 느끼는 반면에 우리 한국은 단일민족사회로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안타깝고 너무나 편협한 시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안타깝고 그래서 그 방면에 관해서 제가 글도 많이 썼습니다.

조선족들의 중국사회의 위치 한중관계의 중계작용과 조정작용 남북관계에 있어서의 가교역할 등 글들을 제가 150편정도 쓰고 책도 냈습니다. 제가 금년만 해도 약 10여 차례 이러한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일부 한국 학자 분들이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적 단일민족 시각으로 다민족 사회를 본다는데 심도 깊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좀 전에 교수님도 잘 말씀하셨는데 조선족들의 인구분포는 현재 중국에 있는 조선족은 220만 모두 223만 명입니다. 그래서 지금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동북지구에 있는 인구가 100만 명 정도 되고, 그다음에 북경, 상해, 청도, 연해지구에 약 50만 명 정도 나가 있고, 한국에 약 3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일본,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인구수가 50만 명에서 55만 명입니다. 이건 최근의 자료라 정확합니다. 그래서 지금 조선족들의 대규모 이주가 있는데 조선족들의 농촌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보면 노인들 하고 아이들 밖에 없고 교육문제가 있고 인재 유출이 많고 정체성 위기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쁜 면을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연해로 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한국과 조선의 발전에 따라서 조선족도 이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중경제발전이 심화됨에 따라서 조선족의 역할과 기능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조선족들은 연해 50-60만 명이 나가 있는데 어떤 작용을 하느냐. 조선족의 기존 정체성, 중국국민과 한민족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사실 중국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수교 후, 진출해서부터 지금까지 한국기업에서 조선족이 떠나면 엄청나게 큰 손실을 입을 겁니다. 왜냐하면 조선족의 인구 이동이 대부분 한국기업의 진출에 따라서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단순한 것을 떠나서 중국의 중계자 역할을 하는 것이 조선족들입니다. 좀 더 보면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고 오늘도 북한의 김정일의 최측근이 왔고 또 평양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북한을 지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어떤 대통령이 올라와도 통일을 이양기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가교역할은 우리조선족들이 합니다. 조선족은 사실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북한을 고국으로 알고 살았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도 남한이 잘 살지만 그들은 북한과 남한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지금 현재 30만의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부에서 방문비자나 취업비자를 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여기에 반한 감정도 큽니다. 조선족들은 평등하게 북한과 한국이 통일을 해서 우리 조선족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선족이 잘 살고 지위가 높아지려면 한국과 북한이 빨리 통일을 하면 고국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중국의 조선족의 지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부산에서 글로벌코리아에 참가했는데 한국과 중국학자들사이에 한국 사람을 불러야 되느냐 중국의 동포를 불러야 되느냐는 간단한 시비가 생겼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일리가 있습니다. 한국학자 분들이 조선족은 좀 비하성이 있다. 중국학자로 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사실 중국조선족은 많은 비하와 차별을 받고 있거든요. 일본의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을 바라보는 선의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지금 연해지역이나 대도시나 북경에 있는 조선족들은 아주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저도 북경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저는 대학 다닐 때 소수민족 우대를 받았고 중국은 소수민족 비하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도 조국의 정을 듬뿍 느끼고 왜 그러느냐 우리가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조선족은 우리민족이기 때문에 우리말도 잘 알아야 되고 중국을 배반하고 우리한테 와야 한다는 것은 편견적인 시각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26만 명에 달하는 재중동포들이 있는데 여기에 한국 분들과 재한중국동포사이에 반한 감정과 서로 어지간히 불신 장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조선족에 대한 정책이 좋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분들은 조선족을 소수민족으로서 남으로, 중국인으로 일상생활을 비하하고 낮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격해지는 면도 있고 또 물론 조선족들도 가리봉동이나 대림동 이쪽에 타운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너무나 중국에서의 일부 진보한 습관을 고치지 않고 한국의 주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국인의 선진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네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해외조선족 700만이 주축을 이루는 조선족은 앞으로 한중경제발전에 가장 중요한 조정자, 중계자의 역할을 하고 남북통일에서의 가교 역할을 할 사람들이 이 200만 조선족 동포들 입니다. 그래서 한중관계는 중국은 미국을 초대해서 투자하고 교역국이 되었습니다.

한중 관계가 심화될수록 조선족의 역할을 커 질것이고 우리 그 21세기 선진국진입과 민족통일 여기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조선족입니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가지고 한국에도 5000명이 되는 석박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중국으로 돌아가는데 이 인적자원을 잘 이용하고 더욱더 형성해서 한국의 기술과 자본, 중국의 우수한 엘리트들의 사명 조선족들이 한족에게 가져온 인맥 시장을 합친다면 WIN WIN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국이 하루빨리 강대해져 가지고 해외에 있는 모든 조선족들을 자기 한민족들을 껴안고 그래서 결국 WIN WIN효과를 가져오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2.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 :장공자(충북대 교수) 

  1)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이해
중국은 냉전체제 붕괴이후 일어나고 있는 세계적인 민족주의와 민족갈등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특히 소련과 유고의 공산정권이 해체되는 과정을 전후해서 일어난 민족간의 갈등의 격화와 사회갈등, 종족간의 갈등이 국가의 분열로 발전하는 현상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전체인구의 약 91%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漢族)과 그밖에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사회주의 국가로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4개 현대화 정책의 달성을 위해 소수민족과의 정치적 통합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변경에 거주하면서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분리독립을 획책하면 안보위협은 물론 더 나아가 국가 분열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 소수민족들은 중국 총인구의 약 9%에 해당하는 1억8백46만 명에 그치고 있으나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주지역은 전체국토의 약 63%에 달하고 있다. 이렇게 한족 우세국가형태의 다민족군(多民族羣)으로 이뤄진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동운명체를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스스로를 ‘통일된 다민족국가’ 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서방학자들은 중국이 5-6개의 나라로 분리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족과 각 소수민족과의 역사적 연관성과 그에 대한 중국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연구하면 그러한 예측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된다. 왜냐하면,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흡수 통합하는 것을 가장 큰 정치적 과제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전시켜 온 이민족 지배제도로는(원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行省制度(소수민족 수령으로 하여금 지방행정장관으로 임용, 세습케 하는 것), 改土歸流(소수민족 지방의 행정장관을 중앙정부가 위임, 파견하는 것) 등 이른바 이민족장관으로 하여금 이민족을 제어토록 하는 ‘土司制度’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역사상 비록 짧은 기간의 할거와 부분적인 분열상황이 출현되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통합은 언제나 중국역사발전의 주류를 이뤘다. 그들은 외침이 있을 때는 ‘중화문화’를 내세워 응집을 호소하고, 평화시에는 ‘중화민족’을 거론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한족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다시 말해서 개별 소수민족의 분리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면서 민족간의 구별과 차이를 없애고 하나의 중화민족으로써 재창출하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삼고있다. 따라서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적 통합은 곧 국내정치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소수민족문제의 해결에 비정치적인 정책적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경험과 이민족을 다루는 특이한 노하우를 신 중국은 마르크스 레닌의 민족이론과 조화시켜 ‘민족평등에 의한 민족구역자치정책’를 소수민족정책으로 채택했다.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의 행정구역은 5개의 자치구(내몽고, 西藏(티벹), 寧夏回族, 新疆위그르족, 廣西莊族), 31개의 자치주(盟), 93개의 자치현 그리고 3개의 自治旗(旗는 縣級임)와 1256개의 민족향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들 소수민족들은 대부분(回族과 만주족은 제외) 각기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 21개에 달하는 민족은 그들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소수민족정책의 핵심은 소수민족으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고 중앙의 정책을 소수민족에게 원만히 적용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내는데 있었다.

이들 소수민족들의 밀집지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중국의 민족구성 형태는 “통일적 다민족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민족융화의 정책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형태는 보다 발전된 상태인 민족융화의 상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도기적인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시기는 개별민족이 각기 자기들의 주거 내지 활동지역(민족자치지역)을 가지고 있고 민족고유언어를 사용하여 민족적 풍습과 경제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족융화의 단계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융화의 단계로의 실현은 상당히 완만하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 민족의 잡거(雜居)를 적극 추진하고, 단일민족의 사회단체 결성이나, 행사 등 조직화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실제로 중국의 30여 개의 省이나 그 밖의 시와 자치구의 거주형태는 단일민족만의 주거지구는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한족이 중심이 되어 소수민족과 잡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은 대대적으로 소수민족지역으로 한족을 이주시켜 한족이 다수를 유지하게 하는 이른바 소수에 대한 다수화정책을 펴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민족 잡거지역 가운데서도 한족이 중심이 된 지역은 민족적 융화의 속도가 빠른 반면, 소수민족의 어느 일족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잡거 내지 취거지역(聚居地域)은 민족융화의 속도가 전자에 비해 느리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중심민족인 한족이 중원에 본거지를 둔데 반해 소수민족집단의 본거지는 변방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국경면적 가운데 약90%는 소수민족의 밀집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총 연장 2만km의 광대한 국경선과 접하고 있어 소수민족의 문제는 곧 중국의 안보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또한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와 동일민족을 이루고 있어 이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독립될 우려가 있으므로 변방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민족분열 또는 영토적 야심을 노정하거나, 문화적인 침투라고 생각되는 어떤 행태에 대해서도 적극 대처하고 있다.
더욱이 소수민족들은 북으로는 몽고족이 집거하고 있는 내몽고자치구를 비롯하여 서북부의 신강(新疆) 위그르 자치구와 영하 회족자치구(寧夏 回族自治區) 등이 러시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서남부의 티벹 장족((西藏藏族)자치구는 히말라야산맥을 가운데 두고 인도, 네팔 등과 접경하며, 남부의 광서 장족(廣西 壯族)자치구는 베트남과 접하고 있다. 그리고 동북으로는 연변조선족 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북한과 접하고 있는 등 15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34개의 소수민족들은 언어, 종교, 풍속, 습관이 같은 동일민족과 국경을 함께 하면서 접경지역에 살고 있는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특히 인접국가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민족문제는 언제든지 소수민족의 지방민족주의와 정치적 독립문제까지 유발하여 영토 주권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정치적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중․소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나 중․월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들 변방의 소수민족들은 특별한 보호를 받기도 했다. 더욱이 1982년 8월, 당 중앙 판공청(黨中央辦公廳)에서는 제22호 비밀문건으로 “당의 민족정책을 철저히 추진하고 민족단결을 강화하는 것은, 반 패권투쟁의 승리와 사회주의 현대화 추진, 조국통일, 국방강화와 관련된 주요 전략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실제로 “신강 소수민족 지구가 소련의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의 제1선이 되어야 한다”고 까지 강조한 점과 한국이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특례법 등을 제정하자, 조선족을 중용하지 말라는 중국 중앙조직부의 지시문이 내렸던 사실 등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해 동화보다는 융화정책(Accommodation)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 소수민족은 경제적 빈곤, 높은 출산율과 문맹율을 보이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농업에 부적당한 기후와 척박한 토질 그리고 정치, 경제 및 교육환경의 미비 등으로 한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생활빈곤, 높은 인구증가 그리고 만성적인 문맹의 원인을 갖게 되었다. 몽고족과 조선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의 문자 해득율은 전체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조선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의 인구증가율이 전체 평균치를 훨씬 웃돌고 있다. 이처럼 경제적인 빈곤과 교육수준의 저하로 인해 그들은 현대화 실현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관습 속에 자신을 지켜가기를 고집한다.

다섯째, 소수민족지역은 안보, 전략상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개발의 여지가 많은 천연자원의 보고이다. 소수민족지역은 농업에는 부적당한 곳이지만, 석유, 석탄, 광물, 산림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이는 앞으로 자원개발을 통한 현대화건설의 기대가 모아지는 경제발전의 잠재적인 지역으로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개발가치가 높은 이들 지역은 전체 국토 산림의 약37%인 4,500만 ha의 산림면적과 총3억kw의 잠재적 수력발전자원을 갖고 있는가 하면, 목재의 경우 전국 총 축적량의 51%, 수력자원은 총 축적량의 52.5%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광서성(廣西省)의 사탕수수, 운남성(雲南省)과 해남도(海南島)의 고무와 커피, 신강성(新疆省)의 면화, 비취, 유전, 내몽고(內蒙古)와 감숙성(甘肅省)의 철강, 티벧의 붕소와 구리, 운남의 대리석과 주석 그리고 내목고․신강성․청해성(靑海省) 및 감숙성 등은 목초지로도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서부의 산악지방은 각종 광물자원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은 소수민족 거주지역이 갖고 있는 특색과 자원개발 등의 경제적 잠재력 그리고 국가안보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소수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민족적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으면서도 민족융화을 이뤄낼 수 있는 소수민족정책을 기도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구역자치법(民族區域自治法)을 통과시킴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처럼 그들의 궁극적인 정책목표는 민족융화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민족동화정책은 무력을 통한 타민족의 흡수통합의 방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민족적 저항과 반발을 불러올 소지가 많고 이는 결국 민족융화달성에 불리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경제 및 문화적인 영향력의 확충을 통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외동족과의 연결고리와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개별민족의 민족의식을 점진적으로 둔화시키는 반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민족융화의 조건을 마련해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다수인 한족을 중심으로 민족간의 광범위한 상호교차거주(雜居)를 보편화시켜 가는 민족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소수민족의 자치권은 위협받게 되고 소수민족은 점차 한족화(漢化)되어가게 되었다. 조선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조선족의 경우는 타민족에 비해 한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중국조선족 사회는 전례없는 진통과 위기를 맞고 있다.

개혁 개방정책의 심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조선족의 취거지역인 연변조선족 자치주와 장백조선족 자치현에서 야기된 인구감소와 산거(散居), 잡거로 인한 민족정통성보존에 대한 위기와 함께 도시로의 급격한 인구이동 등으로 중국조선족 사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먼저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함께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조선족 사회가 형성 발전하게 된 과정과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위상을 살펴보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실현과 함께 대두되기 시작한 민족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제 요소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초점을 맞추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응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국가통합 
통일전선에 의한 민족자결정책 -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획책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은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획책함으로써 국민당에게 타격을 주고자 민족자결의 원칙을 정치구호로 삼고 ‘중화연방공화국(中華聯邦共和國)’의 정치체제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1922년 2전대에서는 ‘민족연합전선(民族聯合戰線)’을 구축하고 구체적인 투쟁목표로써, ㉠군벌타도로 국내평화를 유지하고 ㉡제국주의의 타도로 중화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며 ㉢몽고, 티벹, 회강(回疆:新疆, 寧夏일대)에 자치를 실시하여 ㉣민족자치방(民族自治邦)을 이룩하고 자유연방제로써 중화연방공화국을 세울 것 등을 결의한 바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변방소수민족들의 지방분리주의를 막고 기타 지역에서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제거하여 모든 역량을 혁명투쟁에 투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중화소비에트 시기에는 세 차례에 걸친 전국 소비에트 대표회의를 통해 “중화 소비에트 정권은 중국국경내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승인할 뿐 아니라, 각 약소민족들이 각기 독립된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한다.… 몽고, 회족, 티벹, 묘족, 이족 그리고 고려인(蒙. 回. 藏. 苗. 黎, 高麗人) 등 모든 중국영토에 거주하는 민족들은 완전 자결권을 갖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소수민족의 언어를 존중하고 소수민족의 간부를 임용하며, 중국의 대 한족 배타주의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 국민당정부에 의해 체결되었던 약소민족에 대한 일체의 압박조약은 취소되며 공산당은 ‘세계의 약소민족과 연합’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논조는 항일전쟁시기에 더욱 고조되어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책략으로 민족의 자유분립과 자유연합이 활용되어졌다. 그들은 변강민족을 ‘피압박민족’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을 반란세력으로 발전해가도록 유도했다. 더욱이 1938년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소수민족의 정책은 곧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수민족은 한족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하며, 그들의 고유문자․종교․언어는 계승 발전시키며, 배타적인 범한족주의(汎漢族主義)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후 무장반란시기(1945) 초에는 민족정책을 정식으로 “민족자결”로 채택하면서 변강민족(邊疆民族)의 반란행위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조를 충동했다. 더욱이 7전대 보고에서는 국민당에 의해 저질러진 차별대우를 배타적인 한족쇼비니즘(Han-Chauvinistic)의 결과라고 비판하면서 중국인민의 해방과 소수민족의 평등 그리고 민족자결권과 민족자치원칙을 선언하기도 했다. 

민족문제는 사회주의 혁명의 일부 - 소련모델로의 ‘분할통치’(分而治之) 정책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각 민족들을 적극 참가시키고자 민족자주독립과 민족자결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중국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문제는 중국사회혁명의 일부임을 강조하면서 소수민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레닌은 “정권이 어느 계급의 수중에 있는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서 민족의 자유독립을 인정하면서도 민족자결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계급투쟁의 이익과 목적에 종속시킬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는 "정권이 만약 자산계급의 수중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여 방대한 노동인민을 통치하는 도구가 될 것이고, 무산계급이 정권을 장악한다면 그것은 곧 무산계급이 전복(顚覆)된 수탈계급을 통치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스탈린은 ‘민족’이란, 우발적인 인간의 연합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사회적 경제적 기초를 갖는 견고한 인간공동체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변경지방에 제 원조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토대로 농민해방과 변경지역 민족노동자의 수중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족정책의 요체라 했다.

중국은 이러한 마르크스 레닌의 민족구역자치원칙의 이론과 스탈린이 실행했었던 민족정책의 경험을 중국에 적용시켜 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과거의 민족자결이란, 실제로 민족분열을 뜻했다면서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해야 ‘중국민족의 기본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중국 공산당은 소련식의 ‘분할통치(分而治之)’의 책략을 통해 민족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크게 ‘민족구역 자치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민족구역자치지방의 단계(1949.9-1954.9 헌법제정)”와 “민족자치지방에 대한 행정상의 지위확대 단계(1954.9-1966.12)”로 나눌 수 있다.
㉮ 민족구역 자치지방의 단계느 : 1949년 9월 중국은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政協)을 열어 소수민족에 대한 자치의 형식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정협 강령 제6장에 민족정책에 대한 4가지 조문을 삽입했다. 그 내용은 ㉠민족의 평등권과 대 한족주의, 편협한 민족주의 등 일체의 배타주의 반대(50조) ㉡ 구역의 자치기관은 거주민족의 비율과 지역의 크기에 의해 정하며 일정수의 민족대표를 갖게 하며 (51조) ㉢ 각 소수민족은 역내에 무장할 권리를 갖으며(52조) ㉣ 언어, 문자, 풍습 그리고 종교신앙의 자유를 갖는다(53조). 이 공동강령에 따라 서북, 서남 그리고 동북지역에 민족자치구역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2년 8월 정무원 제 20차 회의에서는 ‘中華人民共和國民族區域自治實施綱要’(綱要)를 제정함으로써 소수민족들은 지방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강요는 조직의 기본원칙으로서 ‘민주집중제’를 규정하는 한편, 권한에 있어서는 지방재정관리, 지방공안부대의 조직, 각 민족의 특징에 의한 자치조례 등을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인준을 거쳐 규정토록 하고 있다. 그 구체적 사항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 각 소수민족의 취거지구는 해당 지구민족과 경제발전의 조건, 역사적인 상황 등에 의거하여 자치구, 자치주 그리고 자치현을 성립하도록 제도화” 한다. 그리고 “각 민족자치구의 명칭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민족의 명칭으로 한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지방 민족 민주연합정부 실시에 관한 법’ 과 ‘소수민족들은 동등하게 민족평등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보장’과 ‘각급 정부의 민족사무위원회 시행 조직 통칙’ 등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에 의거해서 중앙인민정부 조직법과 대 행정구, 성, 시, 구, 현 등 각급 정부에 ‘민족사무위원회’를 설립했다. 그 결과 1954년 6월 중국은 부서(行署) 혹은 전문부서급(專署級)의 자치지역을 25개나 설립했고 현, 현급도 자치지구로 정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몽고자치구를 빼고는 모두 민족명으로 자치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민족구역자치지방의 행정구의 지위는 아직 제도적으로 미비하여 각종 혼란을 야기 하기도 했다.
각 자치구역에서는 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치구는 당 중앙의 영도에 복종해야 하며 상급 인민정부의 영도와 분리될 수 없고 다른 민족과의 협력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각 민족의 자율성과 독자성 그리고 다양성을 허용하면서도 공산체제가 지향하는 목표 및 정책노선에 소수민족을 참여시켜 나가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갔다. 그뿐 아니라,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차별을 없애는데 힘썼다. 특히 모택동(毛澤東)은 1953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행한 ‘대한족주의를 비판하다(批判大漢族主義)’라는 연설을 통해 “소수민족에 대한 대한족주의가 상존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제 민족간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부르조아적 사상이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당 중앙의 민족정책을 제대로 이행치 못한 인민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당원과 인민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민족자치지방에 대한 행정상의 지위확대 단계: 정협 강령을 기초로 한 1954의 헌법의 제4절에 “지방각급 인민대표대회와 지방 각급 인민위원회”를 두고, 제53조 규정에는 “행정구역은 성, 자치구, 직할시, 자치주, 자치현, 현, 시, 향 , 민족향, 진 ” 등으로 정하고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은 모두 민족자치지방으로 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은 다민족 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제 민족 간의 평등과 민족대표선출, 고유언어사용, 자치권 행사 등의 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55년 12월29일 중국은 구 급(區級)이하의 민족자치주, 향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민족자치권의 상황은 대단히 복잡하다는 구실로 사실상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각종 자치권의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민족의 가치보다 혁명을 위한 단결을 더 강조해 갔다. 1956년 4월 모택동은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금은 새로운 혁명의 시기이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10대관계론(論十大關係)”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한민족과 소수민족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도 종래 그가 강조해 왔던 대 한족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회주의를 건설키 위해 모든 민족은 단결해야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비단 모택동 뿐만 아니라, 1956년 8전대의 유소기(劉少奇)의 정치보고에서도 그리고 1957년 주은래(周恩來)나 등소평(鄧小平)의 연설에서도 동일하게 민족 간의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소수민족에게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그들의 거주지역에 산업발전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대적인 민족결속과 유대를 강조키 위해 대 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는 모두 부르조아적이며 반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세계관과 양립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등소평은 소수민족에 있어서 사회주의 교육과 반 우파투쟁은 민족주의적 경향에 반대하는데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면서, 이는 소수민족 출신간부들이 대 한족주의에 저항하여 중앙정부의 정책이 효과적으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조들은 정치적 정풍 운동에 휘말려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지방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운동으로 변모되어 소수민족들이 고통을 받기도 했다. 

한족 우월주의에 입각한 동화정책 - 계급일변도 정책
문혁시기(1966-76)에는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면서 모든 것을 계급일변도의 정책으로 추진해 갔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변방지역을 압도했으며 자치권한은 극히 제한되어 갔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현상은 자연히 한문화(漢文化) 우월주의, 대 한족주의 팽배로 유도되어져 당 간부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에 동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교육개혁과 경제분배체제의 개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수민족의 문화적 특수성을 해체시킨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우선 지방 자치제의 폐지를 목표로 각 지방의 특수성을 묵살한 채 전국에 일률적인 지령을 하달하였다. 또한 민족정책의 부재를 전제로 민족간부 양성은 물론 제 민족의 언어, 문자. 종교, 문화 등을 모두 비 계급적인 것으로 탄압해 갔다.

더욱이 교육에 있어 소수민족학교는 고유언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토록 강요했으며 보다 많은 한인(漢人)을 민족자치구역 혁명위원회의 장으로 임용했다. 그뿐 아니라, 학교행정직과 교직에도 한인을 대거 등용했다. 민족고유의 축제도 폐지되었으며 종교탄압은 극심하여 사원과 불상은 강제 철거되기도 했다. 과거 소수민족에게 유리했던 식량과 필수품에 대한 배급제도도 공평을 내세워 개정했다. 이처럼 문혁시기의 특징은 정권수립이후 소수민족정책으로 지방자치제가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것을 거의 원점상태로 되돌려 놓고 말았다. 이처럼 문혁은 소수민족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점차 중앙정부의 조치에 반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비협조적이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과격한 항거 내지 분리독립 등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현대화실현과 민족자치권 확대 - 민족 간의 융화정책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는데 어려움과 복잡성을 인식한 실용주의 통치세력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중앙집권의 정책을 완화시키는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평등, 민족단결, 공동번영의 구호를 내걸고 소수민족지도자와 간부들에 대한 각종 회유정책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정치체제와 정책이 이들 지역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1978년 신 헌법이 제정되면서 4개항의 소수민족정책이 보장되었다.

그것은 ㉠ 민족의 고유한 문화의 발전을 장려하고 ㉡민족의 대표권을 보장하며, ㉢자치조례를 스스로 제정할 권한을 자치정부에 부여하며, ㉣소수민족의 간부양성에 주력할 것 등을 명시한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주장을 회복한 것이지만 특히 민족간부를 양성한다는 내용이 첨가된 것은 민족자치정책을 통해 대 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통일전선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후 등소평 노선의 경제건설중심의 국가전략이 성공을 보이자 1982년 개정된 신 헌법에는 소수민족의 권익보장과 자치권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헌법은 지방재정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재정적 독립을 보장하였고, 자치정부는 경제건설과 자원개발에 자주적인 관리를 도모할 것과 지역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자체 공안부대를 편성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러한 헌법상 소수민족 자치정부의 권한보장은 호요방(胡耀邦)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1983년 6개 항목의 소수민족정책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 민족지구자치권행사를 위한 여건을 보장한다.㉡ 자치지역 세금을 경감하는 것 ㉢ 소수민족거주지에 융통성 있는 지방정치를 보장하는 것㉣ 자치지역의 생산증대 및 주민생활개선을 위한 국가의 원조제공에 관한 것. ㉤ 민족문화교육과 과학의 발전을 위한 원조를 할 것 ㉥지방간부 승진에 해당 민족출신을 배려할 것 등이다. 이 내용은 제6기 전인대 2차 회의에서 정식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4개 현대화 실현을 내세운 현 통치세력은 민족융화를 우선 과제로 한 소수민족 정책을 목표로 여러 민족의 잡거를 추진하면서 국가로 하여금 소수민족 간부를 적극 배양하여 엄무에 종사케 했는데 현재 전국에는 소수민족 간부가 약 270여만 명이나 된다. 중앙과 지방의 국가권력기관, 행정기관, 심판기관과 검찰기관에는 모두 상당수의 소수민족 간부들이 있으며, 이들은 국가와 지방의 사무를 관장한다. 현재 중국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부위원장 중에 소수민족은 21%를 차지하며 전국 정협 부주석 중 소수민족은 9.6%를 차지하고 있다. 국무원의 고위급 간부 가운데 1명, 국무원 장관급의 2명이 소수민족이며 155개 민족자치지방의 정부주석, 자치주의 장, 현장 혹은 기(旗) 단위의 장도 모두 소수민족으로 충당되어 있다.

더욱이 1998년에 선출된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인대) 참여 대표 중에 소수민족 대표는 모두 428 명으로 전체 대표 2979 명 중 14.37%를 차지하는데 이는 같은 시기 소수민족 인구가 전국 총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 약5%가 높다. 2002년 11월에 개최된 16차 당대회에서는 35명의 소수민족이 중앙위원(정위원 15명, 후보위원 20명)으로 선출됨으로써 전체의 9,83%를 점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극좌와 극우의 변동에 따라 전진과 후퇴의 반복된 변화과정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수민족들은 지방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치란,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있어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형태를 유지한다는 대전제하에 민족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소수민족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정치조직이나 정치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정부의 영도 하에서만 자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있다.

특히 구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가 몰락한 이후부터 중국정부가 특별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소수민족들의 ‘분파주의’와 반체제인사 그리고 사이비 종교집단 등과 국외세력과의 연계 그리고 대만 독립문제 등이다. 그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저지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문제들이 국가통합을 저해하고 체제안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의 조상과 그들의 역사적 성취를 중화민족의 성취라고 규정하는 중화주의적인 해석을 성립시키면서 ‘대민족 대가정’으로의 민족융화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정치적 혹은 민족적 의미를 지닌 집회나 대규모 군중행사 및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상징 조형물의 건립 등은 중국의 주권침해로 간주해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정치적인 자치에 있어서 중국에서는 민족통합이 무척 중요한 요소이며 독립국가로의 독립요구가 없는한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으며, 소수민족의 민족적 특색을 중국정부는 보호자적 입장에서 보존하려한다. 이러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잘 이해하지 못해 한․중간에는 크고 작은 잡음이 계속 일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대외개혁 개방을 통한 경제건설은 추진하지만 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각 지역의 민족문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3)조선족 사회의 형성과 중국에서의 위상
‘각 민족자치구의 명칭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민족의 명칭으로 한다’는 원칙에 의거해 조선족의 자치구역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와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이 탄생하게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구로 건립되었다가 1955년에 자치주로 고쳐졌으며 장백 조선족 자치현은 1958년에 각각 지방자치권을 획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민족자치의 모범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4차 인구조사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약 2백 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수로는 13위에 달하지만,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약 0.7%로 전체 소수민족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2.11%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족은 1949년 이전에 이미 소
수민족의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조선족은 중국의 모든 지역에 산거(散居)하고 있으나 주로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黑龍江省․吉林省․遼寧省) 등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비율을 보면 길림성의 조선족은 전체 조선족의 61.54%(118만3569), 흑룡강성은 23.56%(45만4091), 그리고 요녕성은 12%(230719 명) 그리고 내몽고자치주 등 기타지역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길림성은 2직할시, 5전구, 1자치주와 36현, 2자치현, 7현급 시로 행정이 구획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은 조선족의 취거자치지역이다. 그 외에도 자치향, 진(민족연합진 포함)43개, 촌 1,000여개가 있다. 길림성내의 조선족의 약 반수이상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다. 연변자치주는 연길, 도문, 훈춘, 용정 그리고 돈화(延吉, 圖們, 琿春, 龍井, 敦化) 등 5개 시와 왕정, 안도, 화룔(汪淸, 安圖, 化龍) 등 3개 현을 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가 관장하고 있다. 1985년 통계에 따르면 길림성 장백자치현의 훈강시와 연길시를 합친 조선족인구는 조선족 전체인구의 약 42.7%를 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치지역에서는 정치적, 민족적인 의미를 지닌 집회나 대규모의 군중행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상징물이나 교두보 등의 건립은 허가되지 않는다.

동북3성에 한인공동사회(韓人共同社會)를 구성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문헌상에 나타난 구체적인 이주의 시기는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이루어졌으며, 이주동기는 대략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부류는 경제적 생존을 위한 개척민의 월경이주로써 조선조의 봉건통치에 의한 압박과 착취에 시달리던 주민이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써 국경을 넘었고 또 1869년 한반도의 북부지방의 대 기근에 의한 생존을 위해 본국에서 가까운 중국동북3성 특히 연변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조선족 집거지 형성의 시발로 여겨지고 있다. 흉년에 의한 농민의 이동의 수는 2만에 달했다고 한다. 1860년대에 간도( 돈화가 제외된 현재의 연변지역)에 거주한 한족의 인구는 23,000인데 비해 조선족의 인구는 약 77,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부류로는 한일합방 후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항일민족지사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져 중국대륙으로 망명했다. 특히 용정, 훈춘, 왖정(龍井, 琿春, 汪淸) 그리고 봉천(奉天:심양) 등 지역은 민족운동의 활발한 거점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그 인구도 적지 않았다. 합병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0만이었는데 그중 15만명 정도가 간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셋째부류는 일제가 간도를 지배하고 무순(無順)탄광의 경영권을 차지하면서부터 우리 민족을 만주에 강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1921년 ‘일본인은 한국으로 이주시키고 한국인은 만주에 심어놓는다(日人移韓, 韓人殖滿) ’ 는 정책에 의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인민회사(鮮人移民會社)’ 설립계획안까지 작성하여 만주개척의 촉진을 위해 조선의 농민들을 만주에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34년 10월에는 ‘조선인 내지이주대책’을 결정하고 한국인의 일본이주를 금지하는 대신, 만주로의 이주정책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이민 개척단’이란 미명으로 약100만의 조선 민족이 만주 지역에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1936-41년까지 5년 동안에 강제 이주한 농민만도 18만 명 이상이라 한다. 더욱이 1945년 광복전야에 중국의 조선족 인구는 2,160,000명으로 증가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에는 동북에서 50만, 관내에서 40만 명이 한반도에 돌아갔을 정도로 일제시대의 간도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대부분 인구이동에 의한 것임을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내의 조선족 제1세대는 주로 빈민층, 몰락한 지주계급 및 양반계급 그리고 민족지도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근면하고 개척적이며 잘 적응하고 친화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북경당국은 항시 ‘조선족 자치구역’을 성공적인 소수민족정책의 모범케이스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조선족은 대대로 중국 땅에서 살아온 토착민족과는 다르게 한반도에서 이미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뒤에도 상당기간 동안 거주지를 잠시 중국에 옮겨왔을 뿐, 모국에서 생활하는 한민족(韓民族)과 똑같은 사람으로 자기를 간주하는 등 문화심리상 이중성을 갖고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동포의식이 강하다. 이는 중국정부가 조선족문제에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실 중국공산당도 과거 항일투쟁과 동시에 국민당과 투쟁하던 시절 조선족들을 자신들의 혁명대열에 끌어들이기 위해 한편으로는 ‘중화민족의 해방’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두 개의 투쟁을 동시에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조선족들은 다른 소수민족과는 달리 중국이외의 자기민족문제(조선문제)에 늘 직․간접으로 개입해왔다.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에 적극 참전한 것은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조선족 사회에서 조선반도의 운명에 관심있어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족사회는 빈곤, 무지, 높은 출산율, 문화적 후진성 등 소수민족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는 특징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족은 고유언어와 문자를 갖고 있는 21개 소수민족의 하나로써 사회, 경제적 구조가 한족과 대등하며 인구의 질을 우선하여 다른 민족과는 달리 출산제한과 높은 교육열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문맹을 이미 퇴치한 드물게 보는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높은 교육은 자연히 각급 정부기관의 지도자급으로 발탁되어 자치주의 주석이나 당서기직은 주로 조선족이 차지했다. 그뿐 아니라, 주급의 지도간부의 69%, 현급 지도간부의 54% 그리고 인민공사급 지도간부의 58% 등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의 지도간부의 64%를 차지했으며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위원에 김덕수(金德洙), 후보위원에 김철수(金哲洙)가 15전대에 이어 계속 선출되기도 하는 등 조선족의 정치적 발언권은 이 지역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족은 항일투쟁에서 다른 민족과는 달리 중국에 대한 기여도가 높아 하얼빈 소재 항일열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항일열사 124명 가운데 30명이 조선족으로 민족적영웅으로 존경을 받고있다. 그뿐 아니라, 조선족은 문맹자가 없는 유일한 민족이다.

길림성은 44개 소수민족이 있으며 그 인구는 전체의 약 10.3%인데 그중 조선족인구는 약 4.8%를 차지하며 이는 전국 조선족 인구의 61.5%를 차지한다. 연변자치주에는 종합대학과 전문대가 5개, 중등전문학교가 9개, 중등학교가 237개 그리고 초등학교가 1106개가 있는데 이는 전국 평균보다 높은 수치이다.

또한 조선족은 동북지방에서 주로 임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타민족에 비해 경작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이들은 벼농사의 개척자로서 조선족 취거지역의 논면적은 자치주의 경우 주 전체 논 면적의 66.2%나 되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총생산량은 자치주논 총생산량의 약 70.25%나 된다. 더욱이 쌀은 타 곡물보다 고가품이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형편이다.

문화적 수준도 타민족보다 우위에 있다. 그들은 4만 부 이상의 발행 부수를 갖고 있는 조선어 신문과 12종이상의 문학잡지를 갖고 있으며 조선어방송과 TV 방송을 갖고 있다. 특히 연변가무단은 중국 내에서도 높은 예술적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은 급격한 인구유동을 보이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연변자치주의 경우가 더욱 심각하여 이대로 간다면 조선족 자치주의 존망마져 우려하게 한다. 연변자치주는 90년도에 87만 명이던 인구가 95년에는 78만으로 줄었으며 전체인구의 약 62%를 차지하던 조선족이 40%선으로 감소되었다. 민족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2010년경에는 20%이하로 감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4)개혁 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변화와 민족정체성 
시장경제도입과 민족공동체의식 위기
개혁 개방이래 조선족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거듭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시장경제도입 후 조선족 사회에는 개인주의와 명리주의가 범람하여 민족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민족의 자아의식이 해의되는 등 우려를 낳고있다. 한․중수교로 조선족의 고국의식도 북한뿐 아니라, 남한에까지 확대되면서 민족의 정체를 크게 자각하게 되었다. 투자, 무역, 노무송출 등 한국의 지원과 기회제공은 조선족 사회의 경제, 문화의 번영을 가져왔으며 한국과의 유대도 깊어짐에 따라 민족동질성이 확보되었다. 전국 30개의 자치주 가운데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경제실력1위, 외자도입 1위, 1인당 소득 1위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한국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IMF이후 한국경제의 위축과 중국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으로 최근 조선족자치주는 심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일부에서는 조선족사회의 해체마져 우려하기도 한다. 한국경제 일변도의 지나친 의존과 중국의 기업경제체제개혁은 경쟁력 없는 조선족의 중소기업을 대량 파산하게 했고 중국의 개혁에 따른 극심한 구조조정은 실업자를 급증시켜 조선족사회를 위축시키고 연쇄적인 진통을 유발하게 했다.

한.중 국교 수립이후 친지방문, 기술연수, 유학 및 노무송출 등 여러 형태로 한국으로부터 벌어드리는 달러는 년간 1억4천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년간 재정수입과 맞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IMF체제일 때는 그것이 1/10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국의 금융실명제 실시로 연변에 들어와 있던 음성자금마져 빠져나감으로써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한다. 이외에도 한국으로부터의 년간 2억 元에 달하던 관광수입이 줄자 관광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연쇄적인 도산이 뒤따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족 젊은이들은 보다 경제조건이 좋은 대도시로 직업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경제의 부침은 조선족사회를 급변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최근 수년간 북경, 상해, 천진, 광주, (北京, 上海, 天津, 廣州) 등 대도시로 진출한 중국조선족의 수는 20-30만을 초과하고 있으며 다른 소수민족보다 시장경제체제에 잘 적응함으로써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반면에 시장경제체제에서 오는 부작용도 크다 하겠다. 기존의 전통적인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새로운 규범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품의식에 따른 배금주의, 금전만능주의와 개인주의 등이 만연하는 등 사회경제 및 의식상에서 여러 가지 가치관의 혼란이 일고 있어 민족공동체에 대한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인구감소에 따른 조선족집거지구 붕괴
중국의 조선족이 민족특성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집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조선족 인구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집거정도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연변자치주에서 인구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한 것은 지금까지 4차례였다.

그것은, ㉠ 1951-52년으로 4900명이 감소되었고 ㉡ 1963-64년으로 약 3000명이 감소했다. ㉢1989-1990년으로 이때는 12000명이 감소했으며 ㉣ 1996-1999년까지 내리 4년째 인구 감소했고 그 이후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앞의 세 차례는 전쟁과 자연재해 그리고 인구유동이 원인이었으나 마지막 시기는 유독 자연감소가 원인이었다. 즉, 출생율이 사망률을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족의 출산율은 1.1%로 평균치 1.5%에도 못 미치고 있으며 평균수명 또한 전국 평균치에 못 미치고 있다. 1996년 조선족 인구의 사망률은 6.13%인데 비해 한족은 4.75%로 조선족이 한족보다 1.38%높다. 따라서 조선족의 인구 성장율은 타민족에 비해 현격하게 낮아 1996년의 -1.07%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계속 마이너스성장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연변자치주의 인구증가를 10년 주기로 대비해 보면, 50년대는 4.8만 명, 60년대에는 9.1만, 70년대는 3.8만, 80년대에는 10.1만 명이었다가 90년대에는 2.7만 명에 머믈고 있다. 이처럼 90년대에 들어와서 연변자치주의 인구증가속도가 현격히 둔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대도시로의 유입을 들 수 있다. 흔히들 조선족(특히 연변조선족)은 타민족에 비해 三高의 특징이 있다 한다. 그것은 첫째 문화수준이 높고, 둘째, 도시로의 유입비중이 높고, 셋째로 도시에서의 직공비율이 높다한다. 연변지구의 조선족 도시인구는 이미 인구 총수의 60%를 차지하며 개혁 개방정책에 편승해 대도시로의 이동, 해외 노무송출로 인한 만혼 그리고 한국인과의 혼인(涉外結婚) 등으로 대량의 인구외유가 출생율을 저하시키는 중요원인이 되고 있다. 개방이전 현, 시급 도시에 2만 명 정도의 조선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수가 20여만 명에 이른다.

인구외유는 여성의 경우 더욱 심해서 전체외유 인구 중 70%를 차지한다. 특히 1993-97년 3월까지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이 24,141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의 도시진출은 농촌과의 빈부격차는 물론 혼인 적년기의 남녀구성비가 7:1로 불균형을 이뤄 타민족과의 통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혼인년령이 높아지는가 하면 이혼율도 상승해 인구 감소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1953년 제1차 전국인구조사에 의하면 연변조선족의 인구는 53만8,243명으로 전체 자치주인구의70.4%를 조선족이 차지, 명실 공히 주체민족이었으나 1996년 제4차 전국인구조사에서는 85만 5천명으로 그 비례가 39.9%로 내려갔으며 연길 등 4개의 도시 외에는 점차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집거지구로 변하여 조선족은 자치주 내에서도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으며 그 수치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렇듯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의 축소로 조선족 집거지구가 붕괴되면 조선족 자치주의 기능은 상실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민족공동체 해체와 함께 민족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족교육의 위축과 민족공동체 의식위기
한 민족의 존속과 발전이 민족문화의 존재와 발전을 떠날 수 없듯이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은 민족교육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한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56개 민족이 공존하는 중국에서 동화되지 않고 민족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민족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변자치주에는 민족유치원에서부터 민족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망 체제가 형성되어 있어 중국내의 민족 중에서 가장 높은 교육수준을 이루고 있다. 연변자치주에는 조선족 소학교가 121개소, 중, 고등학교가 45개소 있다. 길림성의 경우는 현재민족소학교가 452개소에 재학생이 101330명인데 그중 350개소의 82434명의 재학생이 조선족이다. 민족중학교의 경우100개소 중 79개소가 조선족 중학교였다. 또한 인구1000명 당 대학 및 중 고등학교 교육정도의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 조선족이었다.

조선족의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은 1999년 사범, 의학, 농학, 인문, 예술, 경제관리, 이공, 과학기술, 체육, 성인교육 등10개의 단과대학을 통합하여 40개 학과 11개교학연구부, 51개 연구기관을 갖춘 종합대학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연변대학은 29개의 점문학부와 57개의 학부 40개의 석사과정과 2개의 박사과정, 6개의 중점학과, 1개의 성 급 중점연구소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족인구의 격감과 외유인구의 증가는 기존의 학교분포의 구도를 파탄시켜 학교폐교가 속출하였다. 학생수의 격감으로 학교 재정난이 심화되자 폐교가 늘었고 그에 따라 먼 거리 통학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면서 중퇴하거나 가까운 한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교육과 취업환경이 좋은도시로의 진출을 위해 민족학교 보다 한족학교를 선호하게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실시하면서 교육도 시장원리에 부응해야했다. 그런데 민족학교는 교사의 질, 교학의 질, 시설 및 교육환경의 질 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연변자치주의 민족교육은 ㉠ 타 직종에 비해 교사임금이 낮기 때문에 좋은 교사학보가 어려워 양질의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욱이 조선족 학교의 경우 이미 대리교사가 36%(한족의 경우는 11%)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 교학의 질과 양이 국가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라 한다. 그런데 조선족학교에는 조선어, 중국어에 교사는 넘치는데 비해 기초과학 과목과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태부족한 형편 이다. 조선족학교의 교사의 학력이 비교적 높다고는 하지만 사범계출신이 적은 편이다. 이것이 교학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1999년도 조선족학교의 입시에서 점수가 한족에 비해 물리, 화학의 평균점수가 각기 6점, 8점씩 뒤떨어지고 있어 취학 및 취업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족학교로의 진학이 증가추세에 있다. 특히 길림성 선거지구의 조선족 초등학생들의 한족학교 진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지방명

장춘

길림

통화

반석

서란

교하

화전

휘남

구전

집안

비율(%)

85.3

85

51.7

44

54

25

66.7

32.4

11.55

40


이러한 실정으로 점차 민족고유언어와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조선족이 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길림성 반석진의 경우 35세 이하의 조선족 가운데 민족어와 중국어를 겸용하는 자와 민족어를 모르는 자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연령

26~35세

18~25세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兼用子(%)

97.1

75.8

60.2

45.5

39.1

不知子

2.9

24.2

39.8

54.5

60.9

이들은 대부분이 겸용하고 있으며, 중학생의 경우는 40%, 초등학생이하의 경우는 절반이상이 민족어를 모르고 있다. 조선어 대신 한어를 차용하여 쓰는 현상이 있다.

조선어의 한어영향화 형상은 조선족의 민족적 일체감의 근원이 되는 조선어문에 대해 매우 위협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조선어문의 변형과 와해는 민족의식 자체의 약화를 초래하고 민족언어를 상실한 민족으로써 -만주족의 전례처럼-민족자체가 소멸되어 한족에 동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조선족학교의 학생들은 진학에 꼭 필요한 과목 외에도 조선어와 조선역사 등을 배워야함으로써 학생들의 부담이 클 뿐 아니라, 이들 과목들은 입시과목이 아니므로 이들 과목의 수업은 자연히 소홀해져 우리말이나 역사에 대한 교육효과도 크지 않다.

민족/학과

물리

화학

생물

지리

조선족

32.5%

39.4%

12.7%

12.7%

한족

49.5%

42.2%

42.2%

36%

게다가 조선어수업은 초등학교 6년 동안 약 1,760여 시간을 배워 학습부담이 한족학생의 1.9배에 달하게 됨으로써 한족학생과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한족학교 진학을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조선족들의 교육상황은 민족교육 발전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할뿐 아니라, 민족 정체의식마저 위협받고 있어 조선족들은 자연히 한족으로의 동화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1.中國民族理事會編,「社會主義市場經濟與中國民族問題」(北京:中央民族大學出 版社, 1994.
2. 中外歷史問題八人談」,中國共産黨 中央黨校出版社, (北京: 1998).
3. 劉先照, 韋世明, 「民族歷史論集」, 民族出版社, 1985.
4. 翁獨健編, 「中國民族關係史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4.
5. 「中國民族學槪論」, 中央民族大學出版社, 1990
6. 王健民, 「中國共産黨史稿」, 第2編, 江西時期 및 第3編, 延安時期. 解放出版社, 1938.
7. 列寧, 「斯達林論中國」(北京: 人民出版社, 1953.
8. 劉春, “當前我國國內民族問題和階級鬪爭”, 「民族團結」, 1964年 7月號.
9. 「民族政策文書彙編」(北京: 人民出版社, 1958.
9. 「匪情硏究」, 第36號 (臺灣, 1973年 12月號).
10. 「中共文化大革命重要文件彙編」(臺灣 : 中共硏究雜誌社, 1973)
11. 賈春增主編, 「民族社會學槪論」(北京:中央民族大學出版社, 1996).
12. 金炳鎬, 「中國朝鮮族人口簡述」(北京:中央民族大學出版社, 1993).
13. 崔昌來, 陳通河, 朱成華, “延邊人口與計劃生育簡論」, 隋喜林 外編, 「發展中的 延邊」(延吉:延邊人民出版社, 1989).
14. 權立, 李洪錫, “有關中國朝鮮族歷史的若干理解, 「北方民族」, 2001年 總卷 44 期 (長春:吉林省 民族硏究所, 2001).
15. 金鐘國, ”延邊朝鮮族人口狀況分析”, 「北方民族」, 2001.
16. 朱在憲, “吉林省朝鮮族敎育基本情況及其發展戰略的思考”,「爲朝鮮族持續發展 服務的民族敎育」, 全國學術硏討會 發表論文集(2002. 1. 15-16, 北京:中央民 族大學 韓國文化硏究所主催).
17. 「中國各民族」(北京:民族出版社, 1961).
18. 「毛澤東選集」, 第5卷 (北京 :人民出版社, 1975).
19. 「鄧小平文選 1975-83」(北京:人民出版社, 1983).
20. 林恩顯, “新疆維吾爾族自治區與政治情勢”, 「問題與硏究」, 1994年 7月號.
21. 江平主編, 「中國民族問題理論與其實踐」, 中共黨校出版社, 1994.
22. 吳仕民主編, 「民族問題槪論」, 四川人民出版社, 1997.
23. 黃光學, 「新時期民族問題硏究探索」,(北京 :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9.
24. George Moseley, "China's fresh approach to the National Question", China Quarterly 24, (Oct/Dec.,1964).
25. Nicolas R. Landy. "Centralization and Decentralization in China's fiscal management", China Quarterly, 61, Mar.,1975).
26. Beijing Review, Vol.26, no.42, Oct. 17, 1983.
27. Mao Tse-tung, "CCP policy on Minority Nationalities", The problems of the minority nationalities Chinese Law and Government, Vol.14, No.4, Winter 1981-82
28. Robert Conquest, Soviet nationalities policy in practice, London Bodleey Head, 1967.
29. J. V. Stalin, The Foundation od Leninism, Peking foreign Language press, 1965
30. Kernig(ed), Marxism, Communism & Western Soceity, (N.Y: Harder & Harder, 1972)
31. Documents od the 1st Session1st Peoplrs Congress(Peking:Foreign Language press, 1955)26. RobertG. Wirsing(ed), protection od ethnic Minority Compareties(N.Y: Pergamon press, 1981)
32.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연변자치주현황: 「중국의 우리 민족」, (서 울: 한울, 1988).
33. 정판용, “재중동포의 가치관변화와 민족정체성문제”, 「세기의 교체와 중국조 선족」(서울: 해외교민문제연구소, 1997).
34. 김삼, “민족동질성확보의 시각에서 본 조선족의 미래상, 「교포정책자료」, 제 57집(서울: 해외교포문제연구소).
35. 조정남, 「중국의 민족문제」(서울: 교양사, 1988).
36. 장공자,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조선족의 정체성”, 「사회과학연구」, (충북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2)
37. 장공자 번역,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그 실천”(中華人民共和國 國務院 新聞 辦公室, 1999.9), 「분단․평화․여성」제5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북한연 구회, 2001).
38. 장공자, “중국조선족의 역할과 남북한 관계”, 「분단․평화․여성」제1권, (민 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북한연구회, 1997).
39. 정인갑, “한민족공동체와 재중동포”, 「한민족공동체」, 제 7호(서울:해외한민 족연구소, 1999.6)
40. 김광억,“ 중국의 한인사회와 문화: 소수민족과 사회적 조건을 중심으로 , 「재 외한인사회와 문화」, 1984.
42 박한식, “중국의 소수민족정책”, 이상우편, 「중공의 새진로」, 법문사, 1986.
43. 이규태, “한중관계에서 조선족문제에 대한 연구”, 한국세계지역연구협의회 춘 계학술회의 발표논문집(1998. 4. 15).
44. 이영희편저, 「10억인의 나라:모택동이후의 중국대륙」, (서울:두레, 1983).
45. 기타 「조선일보」, 인터넷검색;「中國年鑑」, 1995-2000년도;「人民日報」, 「光明日報」 등 참고




[관련기사]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종로19(르메이에르 종로타운) B동 1118호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아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 | 편집인 : 이구홍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혜민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