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 /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주일대사

▲ 신각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 전 주일대사

요즈음 종종 한국의 `일본화` 위험이 거론되고 있다. 명확한 정의는 없으나, 대체로 1990년대 초 이래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상황이 어려운 우리가 구조적 침체에 빠져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인 것 같다. 20년 전의 일본과 현재의 한국은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점에서 단순 대비는 곤란하다.

따라서 일본화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경종을 울리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잘나가던 일본이 왜 1990년대 초 긴 터널에 들어가 아직까지도 그 끝의 빛이 보이지 않는가를 잘 살펴서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에즈라 보걸 교수가 `1등 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을 쓸 만큼 미국 경제를 위협하였다. 당시 일본 산업자본주의는 훌륭한 제품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노즈쿠리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의 제조업을 자랑하였다.

막대한 무역흑자를 배경으로 록펠러재단 건물, 페블비치 골프장 등을 사들이던 일본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와 더불어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에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생산노동인구의 감소도 일조하였다. 그러나 일본 장기침체의 근본 원인은 일본 사회가 `성공의 저주`에 빠져 바뀌는 국내외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을 G7의 일원으로 끌어올렸던 성공의 패러다임을 세계화, 지역화, 금융자본주의, 정보화 등 변화 추세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지 못한 것이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탈냉전과 함께 붕괴된 자민당 주도의 1955년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체제가 정착되지 못했다. 잦은 내각 교체는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정치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하였다. 안정된 정치가 작동하지 않으니까 자원을 필요한 곳에 공정하게 배분하여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일본 경제의 리모델링에 필요한 구조개혁이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정부의 경제정책도 디플레이션 대책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아베노믹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작은 규모의 재정금융확대 조치를 실시하였으나, 국내 소비와 투자를 진작시키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세계 최대의 국가채무를 떠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파이가 늘지 않는 디플레이션 경제가 표를 의식한 고령자 위주의 정책과 함께 일본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일본은 세계화의 큰 흐름에 역행하여 원세트 일체형의 내부 지향 사회로 바뀌어 갈라파고스 현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 일본은 거의 43년간 세계 경제 2위 국가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고 근대화 경험도 우리보다 1세기 빠르다는 점에서 훨씬 여유가 있다. 우리는 소득 면에서는 빠른 산업화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국부 면에서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도 겪고 해서 아직 갈 길이 멀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보다 더 절실하게 현재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다양한 구조적 장애를 제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산층 감소로 인한 민주주의의 활력 상실, 정치권의 동맥경화로 인한 문제해결능력 약화, 양극화가 초래한 사회통합력 저하, 열악한 사회신뢰자산, 해외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제의 취약성, 비창의적 교육과 후진적 노사관계, 늘어나는 복지 수요와 저출산·고령화 현상, 세력전환기에 들어간 동북아 정세, 핵무장과 체제 모순으로 위험도가 높아진 북한 문제 등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지난 70년간 우리 국민은 분단과 안보 위협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양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의 큰 흐름을 타고 꾸준히 발전해왔다. 이제 정치권을 필두로 사회 각계각층은 열리고 투명하며 정의로운 한국사회 만들기에 필요한 새로운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기술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지난 20년간 변화에 제때 적응하지 못한 이웃나라 일본이 겪었던 어려움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