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1944년 8월 대서양을 달리는 영국 순양함을 향해 미국 함대가 각별한 예우를 보냈다. 동맹국의 함정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한 영국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브레턴우즈 협상을 마치고 영국으로 귀환하는 케인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미국 대표 해리 화이트에 밀려 국제청산연맹 설립과 국제결제통화인 '방코르(Bancor)' 도입안이 무산된 탓이다. 세계최대 채권국인 미국의 제안을 세계최대 채무국 영국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금융 질서의 틀을 짠 브레턴우즈 협상 결과와 달리 케인스와 화이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케인스는 종전 직후인 1946년 사망했으나 모든 국가가 1970년대까지 케인스 경제학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케인스 경제학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다. 반면 소련 간첩이었다는 의혹 속에 1948년 심장마비로 급사한 화이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케인스의 국제결제통화 도입안은 사후 21년 만인 196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제22차 국제통화기금(IMF) 연차 총회에서 다시 살아났다. 금(金)과 미국 달러화만큼 효력을 갖는 특별인출권(SDR)이 탄생한 것이다. 준비기간을 거쳐 1969년 SDR가 도입된 배경은 세 가지.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누적과 금 보유 격감, 미국을 빠져나온 달러화의 유럽행(유로 달러) 급증으로 세계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SDR를 불렀다.

미국의 견제로 규모를 키우지 못해 실효적이지 않다는 비관론 속에서도 46년을 이어온 SDR가 최근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SDR를 구성하는 통화 바스켓에 중국 위안화를 포함하는 문제를 놓고 격론이 한창이다. 미국 달러화와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에 위안화가 추가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중국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미국의 반대 여부. 떠오르는 중국과 세계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한 미국 간 화폐전쟁의 서곡이 울린 셈이다.